조일수호조약 연회 기념도. 윗줄 가운데가 김옥균. 불평등 조약 이후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개혁을 꿈꾸던 개화파 청년은 일본 망명 이후 청나라 이홍장과 담판을 지으려고 상하이를 찾았다가 하루 만에 암살됐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을 일본 당국이 절해고도(絶海孤島), 오가사와라섬에 유배시킨 것은 지난 회에 살펴보았다. 여기서 약 2년간 고독, 질병과 싸우던 김옥균은 이번에는 홋카이도로 이송되었다. 일본 벽지에 그를 가둬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 일본 정부의 의도였다. 김옥균이 다시 도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1890년 10월이었으니 4년이 넘는 유배였다.》
이홍장과 담판하려던 김옥균
그런데 김옥균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청으로 갔는지, 그리고 암살의 진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잖은 의문이 남아 있다. 먼저 이경방(李經芳)과의 교류가 주목된다. 이경방은 이홍장의 양자이자 당시 청국의 주일 공사였다. 두 사람은 직접 대화와 서신을 통해 자주 접촉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경방은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후임 공사 왕봉조(汪鳳藻)를 통해 김옥균을 청에 초청했다. 더 이상 일본 정부에 기대를 할 수 없게 된 김옥균은 성공 가능성은 낮지만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이홍장을 만나 담판을 벌이려 했었던 것 같다(다보하시 기요시, ‘근대일선관계의 연구’ 하). 상하이로 가기 직전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에게 “나도 아시아 문제는 중국의 흥망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에 비하면 조선 문제는 작은 문제다. 이건 비밀인데 곧 상하이로 가 이홍장과 담판할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도 그의 흉중을 짐작할 수 있다.
박영효 암살 미수도 이용한 日
김옥균은 수행하던 홍종우가 쏜 총탄 3발을 맞고 사망했다. 암살 당시의 모습을 담은 우키요에(목판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런데 당시 일본에는 김옥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개화파 인사 박영효가 있었다. 철종의 부마로 왕실의 일원이면서 갑신정변에 주역으로 참여했으니, 그에 대한 고종과 민씨들의 원한도 깊었다. 김옥균뿐 아니라 박영효의 목까지 손에 넣는다면 이일식은 그야말로 조선 정부의 영웅이 될 것이었다. 김옥균 암살 소식이 전해지면 박영효 암살은 어려워질 것이니 서둘러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 수하들을 확보한 뒤 자신의 거처로 박영효를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낌새를 챈 박영효가 움직이지 않자 그의 거처로 갔다가 오히려 박과 그 동지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김옥균 암살을 반긴 조선 조정
한편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은 원세개는 즉각 홍종우를 보호하라는 급전을 청 정부에 보냈다. 오가사와라 유배 시절 김옥균을 만나 상하이까지 따라온 섬 소년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는 김옥균의 시체를 일본에 가져가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이미 원세개의 요청을 받은 상하이 당국은 김옥균의 시체를 조선 측에 넘겼다. 홍종우는 김옥균 시체를 조선행 배에 태우고 의기양양하게 귀국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에 대해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는 침묵했다. 자기가 신임 총영사라 부임하자마자 외교적 항의를 하기가 적절치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서였다.
김옥균의 죽음에 일본에서는 호외가 발행되는 등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청과 조선이 김옥균을 죽였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여론이 몇 달 뒤 청일전쟁 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영작 교수는 일본 당국이 김옥균 암살범들의 동향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정계 거물로 암살 모의에 간여한 오미와 조베에(大三輪長兵衛)를 일본 정부가 끝까지 싸고 돈 점 등을 들어 일본 정부가 김옥균 암살을 방치, 방조했다고 주장한다(김영작, ‘누가, 왜 김옥균을 죽였는가: 흑막에 가려져 온 김옥균 암살의 진상’). 김옥균에게는 한중일 삼국 정부가 다 적이었다.
서울 주재 외교관들은 김옥균의 시체를 훼손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다른 재주는 없어도 국왕과 민씨들의 맘을 읽는 데에는 도사이던 조정 신하들은 능지처참하라는 상소를 잇달아 올렸다. 이들은 김옥균이 인조와 영조 때 반역사건을 일으킨 이괄(李适)과 신치운(申致雲)보다 더한 대역죄를 저질렀다며 시체에 대한 추벌(追罰)을 주장했다. 왕이 이를 ‘가납(嘉納)’했다. 고종은 이를 대경사라며 종묘에 고하고 문무백관의 진하(進賀)를 받으며 특별사면을 실시했다. 갈기갈기 찢긴 김옥균의 시체를 안주 삼아 잔치를 벌이던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전주를 함락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