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힙합이라고? 너희들 진짜 뭐하냐?”
그의 준엄한 일갈을 듣고 싶어 사람들이 모여든다. 국내 1세대 힙합 래퍼 원썬(본명 김선일·43)이 최근 ‘쇼미더머니10 리뷰’ 시리즈를 시작한 그의 유튜브 채널은 힙합 팬들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다.
사실 이 시리즈의 형식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원썬이 스튜디오 한가운데 앉아 엠넷의 힙합 경연프로그램 ‘쇼미더머니10’을 회차별로 경연 내용을 평가하는 게 전부다. 참가자들의 공연을 감상하고 즐기면서도 실력을 엄정히 평가한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을 내린 심사위원, 프로듀서, 유명 래퍼를 향해 가감 없이 쓴소리도 날린다.
인기를 보여주듯 유튜브 채널 ‘원썬 Sakkiz’의 구독자는 10월 초 그가 이 시리즈를 제작한 뒤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전까지 2000명 안팎이던 구독자는 시리즈 시작 약 두 달 만에 약 10만 명까지 치솟았다. 시리즈 누적 조회수는 1300만 회에 달한다. 힙합 팬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힙합이라는 장르가 대중화하면서 장르가 갖고 있는 느낌만 좋아하는 사람이 늘었죠. 그런데 이 프로그램으로 힙합을 처음 접한 젊은 세대들은 랩이 뭔지, 힙합이 뭔지 제대로 안다고 할 순 없어요. 제가 힙합을 사랑하는 만큼 그 장르에 대해선 확실히 짚고 알려주고 싶었죠.”
엠넷의 ‘쇼미더머니10’은 올해로 열 번째 시즌까지 이어질 만큼 장수한 프로그램. 열 번째 시즌 우승자로 최근 래퍼 조광일을 선정하며 마무리됐다. 한국 힙합의 대중화를 견인한 프로그램의 공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이토록 열광하는 팬들을 보며 가장 놀란 건 원썬 자신이다. 그는 “참가자를 뽑고 떨어뜨리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제가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밀면서 잘하고 못하고 판단하는 걸 좋아해주시는 것 같다”고 했다. 또 “힙합을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는 게 상당히 고무적”이라며 “비판받는 당사자들은 기분이 나쁠지 몰라도 나중엔 약이 될 거라 생각한다”며 웃었다.
참가자들의 부족한 실력이나 프로그램 연출을 조목조목 ‘까기’만 한다고 인기를 얻긴 힘들었을 것이다. 대중으로부터 그가 각광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힙합에 대한 진정어린 사랑과 해박한 지식 때문이다.
힙합에 대한 그의 진심은 삶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실 그는 본업인 래퍼로서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쇼미더머니5’에 참가자로 출연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유행어만 남긴 채 조기 탈락했다. ‘꼰대 힙합’의 대명사이자 대중의 웃음거리가 됐다.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현역 래퍼로 활동하려는 열망도 식지 않았다. 최근 “한국 흑인음악의 대표가 되겠다”며 국악 선율과 힙합을 섞은 랩 ‘서사 2’도 발표했다. 그는 “음악은 끝이 없다. 아직 이 분야를 점령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끝장을 봤다’고 할 때까지 음악은 계속할 것 같다”고 했다.
숭실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그는 입학 후 전공이 아닌 음악을 본업으로 삼기로 다짐했다. 힙합 음악을 들을 곳을 찾아 홍대, 신촌, 이태원을 떠돌았다. 그는 “음악을 틀어주는 가게에 매일 드나들다 어느새 음료를 서빙하고 있고, 얼마 지나니 제가 음악을 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999년 첫 솔로 음반도 냈다. 아이돌 그룹이 대세인 때였지만, 드렁큰 타이거 등 래퍼를 우러러 보며 가사를 쓰던 펜을 놓지 않았다.
원썬은 최근 채널의 인기에 힘입어 랩 경연 프로그램 ‘방구석 래퍼’를 시작했다. 늘 배고파하며 음악하는 후배들을 위해 새 무대를 만들고, 재야의 랩 고수를 발굴하겠다는 취지다. 내년 1월 15일까지 참가자를 모집한 뒤 채널을 통해 프로그램을 시작할 예정이다. 그는 “멋있고 예쁘고 트렌디한 힙합, 싱잉랩(노래하듯 부르는 랩)도 다 좋다. 다만 기본을 지키는 랩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랩이란 뭘까. 그는 “랩은 곧 시이자 수필이고, 래퍼는 글쟁이”라고 강조했다.
“래퍼는 가수이기 전에 글을 짓고 그 글을 낭독하는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잘 지어진 글을 낭독해야 울림이 크겠죠. 요즘 래퍼들은 본인이 글 쓰는 사람이라는 걸 망각하고 있어요. 좋은 글이 곧 좋은 랩이 된다고 믿습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