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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 누린 김영주[횡설수설/이철희]

입력 | 2021-12-16 03:00:00


1972년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비밀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김일성을 만나 그의 동생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서울을 답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난색을 표했다. “그는 사실 몹시 아픕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반나절밖에 일을 못 합니다.” 이후락이 “그럼 반나절이라도 좋으니 보내 달라”고 했지만, 김일성은 ‘식물성신경부조화증’이란 병명까지 대며 거절했다. 그래도 이후락은 확인해야 했다. 연회에서 김영주에게 집요하게 술을 권했다. 술을 마신 김영주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김영주 대신 서울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다녀갔지만 남북 최초의 공식 합의문인 7·4공동성명에는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과 김영주가 서명했다. 남측은 실무협상 때부터 이후락의 대화 파트너로 김영주를 지목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보부장이자 정권 2인자의 상대라면 마땅히 북한 실권자이자 후계 1순위자여야 했다. 하지만 김영주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외로 신병 치료를 다니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고, 조카 김정일과의 권력투쟁에서도 밀려 퇴장 수순을 밟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김영주를 후계자로 잘못 짚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 매체들이 15일 김정은의 종조부인 김영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1920년생으로 김일성보다 여덟 살 아래인 김영주는 101세로 세상을 떴다. 일제강점기 땐 빨치산 형을 둔 탓에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형이 알선해준 덕에 모스크바로 유학도 갈 수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뒤 귀국해선 권력의 핵심인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시작해 부장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갔다. 형을 대신해 조카의 훈육도 맡았다. 군사훈련에 불참하고 영화 삼매경에 빠져 있던 김정일을 찾아내 두들겨 패선 훈련소로 복귀시킨 적도 있다고 한다. 김정일의 첫 근무지도 삼촌 아래의 조직지도부였다.

▷김영주가 후계자로 떠오른 것은 1967년 반종파투쟁이었다. 김일성 체제에 도전하는 갑산파를 숙청한 이 권력투쟁의 선두에 선 것이 김영주와 김정일이었다. 하지만 숙부와 조카의 합작은 거기서 끝났다. 원만한 성격의 지식인 타입인 김영주는 권력 의지가 약했고 충성경쟁에도 능하지 못했다. 김일성은 “작은아버지가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아들의 보고를 받고 동생을 지방으로 추방했다. 그렇게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권력에서 멀어진 이래 유배 생활을 전전했고 말년엔 실권 없는 명예직에 머물렀지만 그는 천수를 누렸다. 병 때문이든 천성 때문이든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선 철저하게 낮췄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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