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가끔씩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겁다 싶으면 배낭을 둘러메고 떠난다. 가능한 한 낯선 곳으로 가서 걷는다. 익숙하지 않은 곳을 무작정 걷고 또 걷는다. 새로운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그렇게 하루 종일, 그리고 날마다 걸으면 머릿속도 그곳을 닮아간다. 뭔가로 꽉 차 있던 머릿속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되어 간다. 지끈거렸던 머리가 맑아지고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진다.
문제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보니 가끔은 채워주어야 할 배 속도 아무것도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저 앞에 나타나는 모퉁이 너머를 나도 모르게 기대한다. 저걸 돌면 뭐라도 나오겠지?
텅 비어 가는 배를 부여잡고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골라서 왔는데 뭐가 있겠는가?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다. 또 다른 모퉁이만 저 앞에 무심하게 놓여 있다. 그래 그렇지. 뭐가 있겠어? 힘 빠지는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다음 모퉁이 너머를 또 기대한다. 그리고 또 실망한다. 날이 저물어지기라도 하면 조급해지기까지 한다. 불안이 스멀스멀 마음을 채운다. 모퉁이가 나를 속이는 게 아니라 나의 기대가 나를 속이는 건데 자꾸 모퉁이를 탓하게 된다.
그렇게 숱하게 모퉁이를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산다는 건 어쩌면 항상 모퉁이를 도는 일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것만 잘되면 한숨 놓을 수 있겠지?’ ‘이번만 견디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러면서 모퉁이를 돌지만 막상 돌아보면 또 다른 모퉁이만 무심하게 나타나는. 그래서 끝없이 걸어가야 하는. 돌고 돌았는데도 아무것도 없고, 애면글면 안간힘을 쓰고 죽어라 돌았는데 역시 마찬가지인.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며 별생각 없이 모퉁이를 돌았는데 예상치 않은 작은 반가움을 만나기도 하는.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그래서 모퉁이는 새로운 시작이다. 아니 새로운 질문이다. 바라던 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전환점이 될 게 분명한 2021년의 모퉁이를 돌고 있는데 이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루시 M 몽고메리가 쓴 소설 ‘빨강 머리 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