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세종청사에서 15일 열린 브리핑에서 강태중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법원은 이날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생명과학Ⅱ 출제 오류를 인정했다. 세종=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지는 게 이기는 거고 이기는 게 지는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셨죠? 어쩌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는 유식이 견강부회할 수 있는 범위의 무한함에 구역질을 느꼈다.”
박완서의 소설 ‘침묵과 실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견강부회(牽强附會)’, 가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 남송의 역사가 정초의 ‘통지 총서’에 나오는 고사성어입니다.
가령 어떤 동물의 개체 수가 ‘―10’이라면 어떨까요. 생명과학의 이론과 현실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전제입니다. 이런 전제 속에서 답을 구하라는 문제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를 오류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항 속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육과정 성취 기준을 준거로 학업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은 유지된다.”
평가원은 해괴한 말로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 했습니다. 궁색한 변명으로 견강부회한 셈입니다. 이 문제를 접한 수험생들은 자신의 풀이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풀이를 반복하다가 시간 부족에 봉착했을 겁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이면 멘털이 붕괴됩니다.
결국 이 문제의 정답은 사법부의 판결로 뒤집혔습니다. 20번 문항은 ‘정답 없음’, 즉 모두 정답으로 처리됩니다. 판결 직후 강태중 평가원장(65)은 “재판부의 판결을 무겁고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수험생과 학부모님 그리고 선생님을 포함한 모든 국민께 충심으로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까지 수능 출제 오류가 인정된 것은 9차례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평가원장 사퇴로 마무리됐습니다. 검토위원장직을 두고 검토 기능을 대폭 강화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오류를 검토 교사들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온당한 문제 제기가 권위에 의해 묵살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수능에서 국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도 이런 사정과 맞닿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