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양구에서 살았던 박수근이 즐겨 그린 나무는 ‘겨울나무’다.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목(裸木)이다. 그래서 박수근이 그린 나무를 찾아 그 감정을 느끼려면 겨울에 양구에 가봐야 한다.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뒤로 하늘이 회색빛이다. 금세라도 눈이 내릴 듯 하늘은 어두침침하고, 희부옇다. 강원도 양구의 겨울 하늘빛이 박수근의 그림 속에 있다. 나무 밑에 지나가는 여인의 함지박 속에는 절인 배추라도 들어 있는 것일까. 소설가 박완서는 이 그림을 보고 ‘김장철의 나목’이라고 해석했다.
“이제 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가지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박완서 소설 ‘나목’, 1976)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의 모델이 됐던 나무는 양구 시내 양구교육지원청 뒷동산에 있다. ‘박수근 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수령 300년 된 느릅나무다. 그림에서처럼 중간에서 옆으로 휘어진 모습이 똑같다. 박수근은 양구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 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놀며 그림을 그렸다. 내가 양구를 찾았을 때도 세 남매가 놀고 있었다. 나무 밑에 함지박을 이고 있는 여인은 없지만, 누나와 동생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애틋했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 전시회의 이름도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다. 박수근의 그림 속에는 6.25 이후의 강원도 양구와 서울 창신동 판자촌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어머니는 짐을 머리에 이고 산동네 길을 걸어올라가고, 시장에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이 물건을 판다. 거리의 사람들 중에는 노숙자도 있고, 청소부도 있다. 그리고 골목길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포대기에 동생을 업고 있는 소녀를 그린 그림도 발길을 붙든다. 큰 누나에게 업혀서 컸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며 감상에 젖는다. 엄혹한 세월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풍경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사진작가 한영수의 ‘서울 1956~1963’에 나오는 창신동 사진을 함께 전시해 당시의 풍경을 전한다.
“나는 워낙 추위를 타선지 겨울이 지긋지긋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도 채 오기 전에 봄 꿈을 꾸는 적이 종종 있습니다. 이만하면 얼마나 추위를 두려워하는가 짐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계절의 추위도 큰 걱정이려니와 그보다도 진짜 추위는 나 자신이 느끼는 정신적 추위입니다. 세월은 흘러가기 마련이고 그러면 사람도 늙어가는 것이려니 생각할 때 오늘까지 내가 이루어놓은 일이 무엇인가 더럭 겁도 납니다. 하지만 겨울을 껑충 뛰어넘어 봄을 생각하는 내 가슴에는 벌써 오월의 태양이 작열합니다.” (박수근 ‘겨울을 뛰어넘어’, 경향신문 1961년 1월19일자)
프랑스에서 여행할 때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인상파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 장소에 가는 것이었다. 클로드 모네가 그린 지베르니 연못과 노르망디 해변의 에트르타 코끼리 바위, 고흐가 죽기 직전에 그렸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성당과 까마귀 날아다니는 밀밭…. 그림 속 현장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벌써 재개발돼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텐데 말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