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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마님들 스탠더드를 바꾼 국산 미트[김배중 기자의 핫코너]

입력 | 2021-12-21 14:02:00


“웬만한 ‘일제’보다 나아요.”

현역 프로야구 선수와 글러브 이야기를 나누다 선수가 한 브랜드를 언급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선수가 ‘꽃’이라고 불러주고 나니 보이는 게 있었다. 한국시리즈(KS) 우승팀의 안방마님 장성우(31)의 왼손에, 한화 리빌딩의 주축이자 이번 비시즌 자유계약선수(FA) 1호 계약의 주인공인 최재훈(32), 2020시즌 우승팀 NC에서 ‘포스트 양의지’로 애지중지하고 있는 김형준(22·국군체육부대)의 왼손에도 ‘메이드 인 코리아’의 이 브랜드 미트가 끼워져 있었다. 2012년에 설립해 올해로 10년째를 맞은 ‘원에이티’. 노하우가 궁금해 20일 경기 김포시 장기동에 있는 공장을 찾아갔다.


원에이티 글러브 공장 전경. 복층 난간에는 그간 후원해온 선수들의 유니폼이 걸려있다.

20여 평, 복층으로 된 공장 겸 사무실에 박정호 원에이티 대표를 포함해 4명이 이날도 포수미트를 만들고 있었다. 프로야구 등 여름 스포츠는 ‘비 시즌’이지만 시즌을 준비해야하는 이 시기가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다. 공장 한 공간의 종이박스 안에는 프로구단에 납품할 미트들이 주문내역 등이 담긴 메모지와 함께 비닐 포장된 채 담겨 있었다. 박 대표는 “하루에 최대로 만들 수 있는 물량이 6개다. 요즘은 최대치로 일을 한다”며 웃었다.

약 십여 년 전만 해도 엘리트 선수들의 손에는 ‘MADE IN JAPAN’ 각인이 새겨져 있는 해외 유명브랜드 글러브가 끼워져 있는 일이 흔했다. 과거 국산브랜드들이 이 구도를 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자제 수급이라든지 기술력 등 여러 세밀한 부분에서 한계를 노출했다. 프로야구의 인기 속에 선수들의 몸값이 올라가고 ‘스타성’도 돈으로 환산되며 스타 선수들의 용품계약이 별도로 이뤄져 영세한 업체들이 프로 선수의 용품계약 사인을 받아내고 브랜드를 알리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하지만 국내에 자체제작 공장을 꾸린 브랜드들이 등장하며 국산의 품질도 이들과 경쟁해볼만해졌다. 자기 공장에서 무한 실습으로 통해 기술력을 키웠고, 2군 선수 시장 등을 공략하며 이들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데이터’도 축적했다. 선수들의 기호를 반영한 글러브를 해외 브랜드들보다 빨리 제작해주며 선수들의 주머니보다 ‘마음’을 사로잡았다. 글러브나 미트는 선수들에게 신체의 일부와도 같기에 거액이 포함된 후원계약이 아니라면 선수들로서는 ‘인생장비’를 찾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야구용품 업계를 180도 바꿔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1’과 ‘80’을 분리해 ‘원에이티’라고 명명하고 글러브를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박 대표도 큰 흐름에서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공장이 있진 않았다. 프로야구 붐에 편승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제작한 글러브를 판매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공장과 소통이 잘 안 돼 주문 ‘미스’가 나기도 했고, 공장과 소비자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단다. 사업 3년차에 접어든 2014년 5월, 박 대표가 제작능력을 갖춘 국내업체들의 문을 두드리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판매자’에서 ‘제작자’로 거듭난 순간이다.

포수미트를 제작 중인 원에이티 직원들.

“도자기 장인을 보면 잘 만든 도자기를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깝게도 부수곤 하잖아요. 미트 제작 기술을 배우고 직접 만들기 시작하던 초기의 제가 그랬어요. 1년 넘게 만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고, 또 만들고 버리고…. 주변에서 ‘너 돈 많아? 왜 자꾸 버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제 성격이 까다로운 건지 남의 돈을 받고 물건을 넘기는 일인데, 대충은 못 하겠더라고요. 나중에는 보다 못한 타 브랜드 공장 대표님이 ‘그 정도면 돈 받고 팔아도 돼. 우리 브랜드로 제작해줘’라며 20개나 주문해주셨어요. 제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거죠.”

키가 180cm가 넘는 장신에 체구가 좋아 동호인 야구에서 주로 포수를 맡은 박 대표는 제작자로 거듭나던 때 포수미트 제작에 애정을 쏟았고, 포수미트가 자연스럽게 원에이티를 상징하는 상품이 됐다. 시간이 지나 사세가 커지고 직원도 늘었지만 올해부터 아예 다른 포지션의 글러브 제작을 멈추고 포수미트만 만들었다. 박 대표는 “야수 9명 중 1명만 끼는 장구에 ‘올 인’하는, 소위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많이 우리 제품을 알아주시고 찾아주셔서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돈을 좇았다면 엄두를 못 낼 일이다. 글러브 시장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게 외관이 예쁘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내야 글러브다. 포수미트의 경우 박 대표의 표현처럼 야수 9명 중 1명만 끼는 ‘9분의 1’ 시장이다. 동호인 야구 영역에서는 궂은일을 많이 하는 포수가 ‘기피대상’이라 미트 등 포수장비는 개인보다는 팀 차원에서 구비하는 일이 잦아 실제 실수요는 ‘9분의 1 이하’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미트시장은 어중간하면 살아남기 정말 힘들다.


원에이티에서 직접 제작하는 펠트(왼쪽)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펠트. 원에이티 펠트가 견고한 데다 손 곡선을 따라 살짝 둥글게 휘어졌고, 이 형태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실을 사선 방향으로 수차례 더 감았다.

생존을 위해 제작능력을 갖춘 원에이티가 미트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 ‘독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글러브는 마치 사람의 몸처럼 뼈와 근육 그리고 피부로 구성돼있다. 글러브 안을 채우는 ‘펠트’가 뼈와 근육에 비유되고 피부가 눈에 흔히 보이는 글러브 외피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치를 뽑으려면 주로 외관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원에이티 미트는 글러브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모아놓고 속자재부터 겉까지 공장 안에서 모두 직접 만든다. 전 세계 미트 중 가장 단단하다고 자부할 펠트(뼈대)를 한 겹 한 겹 붙여 만들고 그 위에 가죽을 엮는다. 타공(바늘구멍)을 최소화하고 작업자가 책처럼 뻑뻑한 펠트를 바늘을 든 손으로 직접 뚫고 들어가는 업계말로 시간이 2~3배 더 드는 ‘무식한’ 방법을 고집하면서 한 치의 빈틈없이 견고한 미트를 만든다. 안 보이는 부분에도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이다.

‘공장’에서 하루 최대 6개 밖에 못 만든다고 한 이유다. 박 대표는 “시속 140~150km대의, 볼 끝이 지저분할수록 높이 평가받는 투수의 공을 수도 셀 수 없이 ‘안정적’으로 받아내야 하는 용품이다. 동호인 야구에서 포수를 하기에 포수들의 민감한 부분까지 가슴 깊이 느끼고 있다. 그렇기에 쉬운 길이라고 해도 쉽게 눈이 안 간다”고 말했다.

물론 보람도 있다. 제작자가 되고 약 2년 뒤 직업병으로 엄지손가락 통증을 안고 산다던 한 프로야구 선수에게 자사 제품을 들이밀었다가 “저 ‘이런 거’ 안 씁니다”라는 뼈아픈 말을 들었단다. 하지만 2년 뒤 그 선수에게 직접 “쓰고 싶다”는 연락이 왔고 지금까지 동행을 이어가고 있단다. 박 대표는 “심한 말을 들으며 거절당한 날이 제작자로 가장 슬펐던 날이고, 반대로 그 선수가 쓰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을 때 가장 기뻤다. 엄지손가락 보호대 없이 미트를 못 끼던 선수가 우리 미트는 보호대 없이도 쓴다. 선수가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2021시즌 기준으로 최재훈, 장성우를 비롯해 10구단 주전 및 주전급 선수 13명이 원에이티로부터 용품후원을 받았다. ‘내돈내산’으로 사용 중인 프로 및 아마추어 야구 엘리트 선수들의 수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박 대표는 “후원의 기준은 없다. 해외 브랜드처럼 돈까지 안겨다줄 여력은 없지만, 그래도 선수가 직접 연락을 해 와서 ‘쓰고 싶다’고 하면 필요하다는 만큼 만들어준다. 구석에 박아두지 않고 많이 써주면 된다”며 웃었다.

프로 선수들에게 지급한 뒤 한 시즌을 치르고 분석 용도로 돌려받은 글러브들. 글러브의 변형, 가죽 늘어짐 등을 확인해볼 수 있다.

공장 한쪽 벽에는 제작 초기시절 선수들이 한 시즌을 치른 뒤 분석을 위해 돌려받았다는 포수미트들이 빽빽하게 걸려있다. 시합 및 연습에서 한 해 동안 수만 개의 공을 받았을 미트지만 겉면에 묻은 손때를 빼면 새것 같다. ‘데이터 북’으로 불리는 두꺼운 수첩에는 선수들의 이름과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최고를 지향하다보니 선수용, 일반용을 따로 구분해 만들지는 않아요. 대신 선수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의 데이터도 우리만의 용어로 정리해서 가지고 있어요. 미트가 기본적으로 가죽 제품이다 보니 10개면 10개 모두 똑같이 만들기는 어려워요. 그래도 여러 디테일한 수치들을 축적해서, 우리 미트를 써보고 좋다고 느껴서 다시 의뢰를 맡기는 분들이 그 느낌을 다시 가져가게 하려고 노력해요(웃음).”

데이터북을 들고 설명하고 있는 박정호 원에이티 대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있기에, 대표팀 선수들이 정이 아닌 품질로도 앞선 ‘메이드 인 코리아’ 글러브를 흔히 낄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김포=김배중 기자 wante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