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노동당 총비서)이 지난 2018년 4월27일 오전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나고 있는 모습. 2018.4.27/뉴스1 © News1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호주 방문에서 종전선언 추진에 대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 관련국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모두 원론적·원칙적 찬성 입장을 밝혔지만, 북한이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을 근본적으로 철회하는 것을 선결조건으로 요구하고 있어 아직 대화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의 언급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의 무대로 기획했던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하고, 북한에 대한 첫 제재를 단행하면서 종전선언이 사실상 물 건너 간 게 아니냐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을 때 나온 것이어서 주목됐다.
이는 북한의 호응만 있다면 여전히 종전선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고, 미국의 진전된 태도를 촉구하는 것으로도 읽혔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까지” 종전선언을 추진해 나가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거듭 강조했다.
그런 만큼 지난 2019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노딜 이후 남북 및 북미 대화의 교착상태가 장기화되고 있는 현 상황을 바라보는 문 대통령의 심정은 그 누구보다 착잡할 것으로 짐작된다. 현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의 비핵화와 연계돼 있던 ‘종전선언’ 카드를 남북 및 북미 대화의 모멘텀이자 비핵화의 출발점으로 전진 배치하는 구상을 제시한 것도 문 대통령의 절박한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지난 9월 유엔총회에서 다시 시작된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에 대한 호소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에서 반보 나간 ‘전략적 관리’에만 치중하고 있는 조 바이든 행정부를 조금씩 움직여 종전선언 문안 협의를 마무리하는 단계까지 끌고 왔다. 문 대통령이 언급했듯 종전선언의 당사국이 될 수 있는 북한과 미국, 중국의 ‘원칙적 찬성’ 입장도 이끌어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21일(현지시간) 오찬 겸해 단독회담을 갖고 있는 모습.(바이든 트위터) 2021.5.22/뉴스1
그러나 문제는 종전선언 협의가 이 이상 진전되지 않고 있고, 진척되기도 힘들다는 데 있다.
우선 북한은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할 수 있는 종전선언보단 실질적인 대북 제재 해제를 받아내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입장에서 보면 문 대통령과의 3차례 남북정상회담, 2차례의 북미정상회담까지 해볼 수 있는 정치적 이벤트는 충분히 해봤다. 때문에 집권 10년을 맞은 김 총비서에겐 이벤트보단 실질적인 결과물이 필요한 시기다.
이런 북한을 상대로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여전히 불신하면서 대북 제재 해제를 고려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제재 이행 및 강화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저지 등 우선순위 외교 현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라 북한에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인다. 북한에 대해 ‘전략적 상황 관리’만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미국내 정치적인 상황도 종전선언의 진전에는 좋지 않은 요인이다. 내년 중간선거 승리가 필요한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선 자칫 공화당에게 공세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종전선언을 무리하게 추진할 이유가 없다.
북한의 실질적인 비핵화가 담보되지 않은 종전선언을 하고 난 뒤 오히려 북한은 물론 남한 내부에서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연합훈련 영구 중단, 유엔사령부 해체 주장이 연쇄적으로 나온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후폭풍에 직면할 수 있다. 이미 한국계인 영 김 등 공화당 하원의원 35명이 이같은 문제를 지적하면서 비핵화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종전선언을 반대한다는 ‘경고 서한’을 바이든 행정부에 발송한 상태다.
종전선언에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은 내년 베이징 올림픽을 염두에 둔 ‘립서비스’에 불과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막상 종전선언에 대한 협의에 돌입할 경우, 중국은 자신들에겐 실익이 별로 없다는 판단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국내 정치적 상황도 녹록지 않다. 역사적 이정표로 자리매김해야 할 종전선언을 놓고 여야는 이미 첨예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우여곡절 속에 종전선언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만약 내년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질 경우 이를 되돌리려는 시도가 있을 수도 있다.
실제 미국의 싱크탱크 인사들 중 일부는 지난달 30일 홍현익 국립외교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세미나에서 “만약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지금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게 뒤집힐 수 있다. 미국은 현재 한국 정부가 요청하는 부분을 불안해하고 있다”(스캇 해럴드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위원)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임기가 5개월이 채 남지 않은 문 대통령이 이제는 종전선언의 바통을 차기 정권에게 넘겨줄 준비를 하는 게 보다 현실적이라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을 수도 있다. 차라리 남은 임기 내에 전 국민의 호응을 받는 종전선언을 만들기 위해 여야 대통령 후보와 공감대를 이뤄내는 데 집중하는 게 더 필요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의 저서 ‘운명’엔 문 대통령이 노무현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맡았을 당시 “흔히 임기 후반부를 하산에 비유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참여정부에는 하산은 없다. 끝없이 위를 향해 오르다가 임기 마지막 날 마침내 멈춰선 정상이 우리가 가야 할 코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금도 이 생각에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등산을 하다 체력과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하산을 선택하는 게 더 올바른 결정일 수 있다. 더욱이 지금은 시간이 촉박하고 정상까지 가기엔 갈 길이 험난하고 멀다.
(워싱턴=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