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생존 비결은 강함이 아니라 친화력
남에겐 잔인해지는 다정의 한계 극복해야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가 각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올해의 책’은 브라이언 헤어의 공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입니다. 진화인류학자가 쓴 이 책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고 주장합니다. 경쟁과 이기심이 아닌 협력과 연대의 관점에서 진화론을 재해석한 메시지는 어느 한 사람이 위험해지면 모두가 무사할 수 없는 감염병 시대여서 울림이 큽니다.
진화론은 오랫동안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으로 오독됐지만 찰스 다윈도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다”고 썼습니다(‘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인간은 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만 관심 있는 이기적인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감성지수(EQ) 높은 존재여서 번성했다는 것이죠.
다른 동식물 사례는 생략하고 인류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인의 역량으로 치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힘도 세고 뇌도 15%나 더 큽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이 10∼15명의 무리만 짓는 동안 호모사피엔스는 그 이상의 규모로 연대할 줄 알았습니다. 네덜란드 사상가 륏허르 브레흐만의 표현을 빌리면 네안데르탈인은 초고속 컴퓨터이고 인간은 구식 PC지만 와이파이를 이용할 줄 아는 종입니다. 인간이 협력적 의사소통으로 살아남은 진화의 흔적은 신체에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얼굴 붉힐 줄 아는 유일종입니다. 타인의 생각에 반응한다는 뜻이죠. 흰 눈자위를 지닌 유일한 영장류이기도 합니다. 눈빛만 보고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은 잔인한 표변을 비인간화로 정당화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털북숭이 짐승이거나 뿔 달린 악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겐 잔혹해지는 다정함의 한계도 ‘인간화’로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목숨 걸고 유대인을 구해주었습니다. 대단한 영웅심도, 종교적 신념 때문도 아닙니다. 전쟁 전 유대인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을 뿐입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조지 오웰은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잡고 도망치는 적을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파시스트가 아니라 분명 나와 같이 생긴 인간… 그에게 총 쏘고 싶지 않았다.’
새해에도 코로나 사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체 줄넘기를 해야 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넘어지거나 뛰지 않으면 모두가 넘어지는 게임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지구상에 존재했던 99.9%의 종이 멸종하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다정함입니다. 참호전이 한창이던 1차대전 때도 영국군과 독일군은 참호 밖을 나와 함께 캐럴을 부르고 담뱃불을 교환하는 성탄절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차별과 혐오의 참호에서 빠져나와 서로 눈 맞춤하며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다정한 새해가 됐으면 합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