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도 손주를 법적으로 입양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친부모의 손을 떠나 교류가 거의 없이 사실상 조부모에게 양육된 상황이라면, 입양되는 게 미성년자인 손주의 행복과 이익을 위한 길일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입양이 허용돼 조부모·손주 관계에서 부모·자녀가 되면 민법상 친권, 부양·보호 의무, 상속 순위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는 A씨 등 2명이 미성년자 입양허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낸 재항고 사건에서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울산가정법원으로 보냈다.
A씨 등은 지난 2018년 손자인 B군을 입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그러던 중 A씨 등은 B군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입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A씨 등은 B군이 친부모가 아닌 조부모에 의해 길러진 것을 알고 충격을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부모 없이 학창생활을 보내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점도 입양을 요청하는 사유로 들었다. B군 친부모들은 A씨 등과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고 입양에는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원심은 가족 내부질서와 친족관계에 혼란을 일으킨다며 입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심은 A씨 등 조부모가 친부모가 된다면, 결국 B군으로선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누나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가족질서에 중대한 혼란이 초래된다며 입양을 불허했다. 굳이 입양을 하지 않더라도 A씨 등이 후견을 통해 B군을 양육할 수 있다고도 했다.
민법 867조는 현재 어떤 환경에서 양육되고 있는지, 양부모가 양육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입양하고자 하는 동기는 무엇인지 등을 고려해 미성년자의 행복과 이익에 부합한다면 입양을 허가하도록 한다.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유엔아동권리협약 21조도 입양을 할 때는 아동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해 결정돼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를 근거로 재판부는 조부모에 의한 입양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손주의 행복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판단해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처음 명시했다.
구체적으로 손주가 어떤 이유로 조부모에게 길러졌는지, 양육 상태는 어떠한지, 자녀와 조부모가 몇 살인지, 이들 간 부모·자녀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는지 등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사정을 종합적으로 심리해 손주가 입양으로 얻을 행복과 불이익을 비교해 입양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단순히 가족관계와 질서에 혼란이 초래된다는 사정만으로 입양을 불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선시대에도 외손자를 입양하는 사례가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 전통이나 관습에 배치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B군 사건의 경우에는 바로 입양을 허용하라는 취지가 아닌 조부모에게 입양될 때 어떤 행복과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우려되는 사정은 없는지 원심이 심리가 부족했다고 지적하며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은 친생부모나 B군에 대한 가사조사나 심문 등을 통해 입양이 B군에게 도움되고 우려되는 점을 구체적으로 심리하고 비교형량해 복리에 이익이 되는지 판단해야 했다”며 “이러한 점을 충분히 심리하지 않은 채 입양을 불허한 잘못이 있다”며 사건을 파기이송했다.
다만 조재연·민유숙·이동원 대법관은 입양이 B군 사건의 경우 행복과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니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A씨 부부의 경우 B군을 입양했다는 것을 비밀로 하고 자신들의 친자녀인 것처럼 키우려 했는데, 그럴 경우 B군이 나중에 성장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우려다. 입양이 아닌 후견인으로 양육을 한다면 나중에 친부모가 다시 친권을 회복할 수 있으므로, 영구적으로 친부모의 지위를 빼앗는 입양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