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 마세라티의 첫 ‘미드엔진 스포츠카’ 스포티하면서 우아한 분위기 연출… 화려한 꾸밈새와 다양한 편의 장치 럭셔리 스포츠카 기념비적 모델로… 564대만 생산돼 수집가에게 인기
1971년 3월 스위스 제네바 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인 마세라티 ‘보라’.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1960년대 중반, 재정난에 허덕이던 마세라티는 파산 위기를 겨우 넘기고 프랑스의 시트로엥을 새 주인으로 맞았다. 시트로엥은 1968년에 마세라티를 인수한 뒤로 모델 라인업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마세라티는 모터스포츠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스포츠카 시장에서는 다른 업체들의 그늘에 가려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빼어난 스타일의 기블리로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쟁쟁한 경쟁자들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었다.
특히 그 무렵 스포츠카 시장의 흐름이 바뀌면서 여러 업체가 새로운 설계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마세라티는 그렇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고성능 스포츠카의 엔진을 탑승 공간 뒤에 놓는 설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66년에 나온 람보르기니 미우라와 데 토마소 망구스타, 1967에 나온 알파 로메오 33 스트라달레와 페라리 디노 206 GT 등이 대표적이다. 이른바 미드엔진 스포츠카가 대세가 된 것이다.
마세라티는 시트로엥의 든든한 후원을 바탕으로 늦게나마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3년여에 걸친 개발 끝에, 1971년 3월 11일 스위스에서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서 보라가 공개되었다. 보라는 페라리, 람보르기니, 데 토마소와 같은 당대 유럽 스포츠카 브랜드 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만든 야심작이었다.
실용적이고 편안한 꾸밈새는 당대 동급 차들과 구분되는 보라의 특징 중 하나다.
쐐기를 연상시키는 날렵한 차체는 1960년대의 곡선과 1970년대의 날카로운 선이 어우러져 스포티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기저항 계수는 이례적으로 낮은 0.30에 불과했다. 이는 컴퓨터 설계와 풍동 시험으로 만든 21세기 차들에서도 흔치 않은 수준이다. 날렵한 차체가 보기 좋은 데 그치지 않고 기능과 효율을 모두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타일 이상으로 주목받은 것은 기술이었다. 보라는 완전히 새로운 설계와 스타일로 과거의 마세라티에 작별을 고했다. 설계는 오랫동안 마세라티의 기술을 책임져온 줄리오 알피에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유행을 따라 엔진을 차체 뒤쪽에 얹은 미드엔진 설계를 채택했다. 그 덕분에 차체 앞쪽을 날카롭게 만들 수 있었다.
마세라티가 오랜 세월 개선해 성능을 높인 V8 엔진은 300마력 이상의 출력을 냈다.
뒤 차축 앞에 놓인 엔진은 앞서 나온 기블리에 쓰인 것을 이어받았다. 초기에는 4.7L, 후기에는 4.9L로 배기량이 커진 강력한 V8 엔진은 그 뿌리가 1950년대 후반 스포츠카 경주에서 활약한 450S의 엔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개발 책임자였던 줄리오 알피에리가 1960년대 초반 스포츠카 경주에 투입했던 ‘버드케이지’ 티포 63 및 65 경주차를 위해 개발한 엔진 기술을 접목해 탁월한 성능과 신뢰성을 갖췄다.
날렵한 차체 앞 부분 한 가운데에는 마세라티의 삼지창 마크가 담겨 있다.
사실 보라는 당대 가장 실용적인 고성능 스포츠카 중 하나로 꼽힌다. 엔진을 차체 뒤쪽으로 옮기면서 빈 보닛 아래에는 카펫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적재공간이 자리를 잡았다. 실내의 호화로움도 돋보였다. 좌석과 도어, 대시보드는 모두 고급 가죽을 씌웠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에어컨도 선택해 달 수 있었다. 파워 윈도는 기본이었고, 스티어링 휠은 각도와 거리를 모두 조절할 수 있었다.
콘셉트카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은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솜씨다.
마세라티가 내놓은 보라는 564대에 불과하다. 완성차가 구매자에게 전달된 1971년부터 생산이 중단된 1978년까지 선보인 대수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고성능 스포츠카들과 비교할 때는 물론, 절대적으로도 많은 수는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판매가 이루어질 시기였던 1973년에 있었던 1차 석유파동이 고급차와 스포츠카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시기를 잘못 만난 걸작이었던 셈이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