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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닉스’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베티’[움직이는 미술/송화선]

입력 | 2021-12-24 03:00:00

게르하르트 리히터 ‘베티’(1988년),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소장.

송화선 신동아 기자


한 해의 끝머리에서 ‘피닉스’(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가 떠오른 건 올해 본 영화 가운데 마무리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기 때문인 것 같다. 주인공 넬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붙들려 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이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머리에 총을 맞아 얼굴이 참혹하게 부서진 모습으로 고향 베를린에 돌아온다. 넬리가 성형외과 의사에게 바라는 건 하나뿐이다. “예전 내 얼굴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그는 수술에서 회복하자마자 거리로 나가 연락이 끊긴 남편을 찾아 헤맨다. 그 사이 집은 폭격으로 산산조각 났고, 친정 가족도 다 죽음을 맞았지만 넬리는 행복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남편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말이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편 요하네스가 정작 넬리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요하네스는 아내가 죽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다만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 ‘덕’에 처가의 막대한 재산을 아내 명의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요하네스는 자기 앞에 나타난 ‘아내와 닮은 여자’, 즉 ‘진짜 넬리’를 이용해 넬리의 유산을 빼돌릴 계획을 세운다. 남편이 언젠가 자신을 알아봐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넬리 또한 이 바보 같은 작전에 동참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과정에서 이들을 둘러싼 어두운 과거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페촐트 감독은 ‘피닉스’ 개봉 무렵 외신 인터뷰에서 “사람이 얼굴을 잃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굴을 잃는 건 곧 세상을 잃는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읽다가 문득 독일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베티’(1988년)가 떠올랐다.

리히터가 딸 베티를 모델 삼아 그린 이 유화는 아이의 보이지 않는 얼굴 때문에 화제가 됐다. 영화 속 넬리처럼 화사한 빨간색 옷을 입은 소녀는, 몸을 틀어 저 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채색 어둠을 응시한다. 리히터는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 위를 마른 붓으로 문질러 물감이 번지게 함으로써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작품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피닉스’에서 리히터가 떠오르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1932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었다. 화가의 삼촌은 나치에 부역했고, 정신질환이 있던 이모는 ‘열등한 인간’을 절멸시키려 한 나치 정책에 따라 강제 불임수술을 당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 모든 기억을 가슴에 품은 리히터가 화가가 된 뒤 창조한 기법이 바로 ‘경계 흐리기’다. 그는 삼촌과 이모의 생전 사진을 그대로 본떠 그린 뒤 캔버스에 마른 붓질을 거듭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베티’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참혹한 고통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전설 속 피닉스(phoenix)는 자기를 불태워 만든 잿더미 속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날아오른다. 인간 또한 이 모든 고통을 딛고 다시 살아낼 수 있을까. 영화 ‘피닉스’와 리히터의 삶을 보며 묻게 되는 질문이다.


송화선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