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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년 전 거대 제국 이룬 흉노, 비밀병기는 메신저”[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입력 | 2021-12-24 03:00:00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까똑.”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모바일 메신저의 알림, 때로 귀찮지만 이제 우리 삶은 이 메신저가 없이는 살 수 없게 됐다. 메신저로 열린 스마트한 세상이 도래하면서 어느덧 우리에게 익숙했던 도장 찍힌 문서들은 사라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장, 합격통지서 등 우리 인생의 주요 고비에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문서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우리 삶에서 메신저가 그 모든 결정을 대신하고 있다. 심지어 백신 접종을 비롯한 병원 예약, 결혼과 부고는 물론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선거에서도 메신저를 통한 연락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고 있다.

때로는 우리의 모든 순간을 결정하는 메신저의 등장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메신저로 나라를 움직인 것은 지금만의 일은 아니다. 바로 2300년 전 중국의 북방과 몽골 일대를 호령하던 유목 제국 흉노는 글자 없이 메신저로만 거대한 제국을 일궈냈다. 중국과 맞서 거대한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메신저로 다스렸던 그 모습에 스마트 사회에 적응하는 우리를 비추어보는 것은 어떨까.》



메신저로 이어진 거대 제국

흉노와 적대적이던 중국은 그들의 야만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글자가 없고 나무에 새겨 표시하거나 끈을 꼬아서 뜻을 전한다.” 마치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런데 천하의 진과 한나라는 수백 년간 글자도 모르는 그들에게 쩔쩔매고 살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흉노는 간결한 메시지로 통치했으며, 국가 조직을 최대한 단순화해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법률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화했다. 흉노의 정부조직은 가운데 왕을 두고 그 왼쪽과 오른쪽에 측근을 배치하는 식이었다. 마치 사람에게 두 팔이 있는 것과 같다. 그 하부조직은 마치 손가락처럼 십진법에 근거해 5명 또는 10명 단위로 조직을 만들었다. 이런 조직은 인간의 신체적인 특징과도 잘 부합되니 특별한 가르침이 필요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다시 그 밑에 하부조직을 만드는 식으로 하니 아무리 세력이 커져도 자신이 상대하는 이는 10명 내외의 사람들이다. 그렇게 간결하되 엄정한 원칙은 유목민들이 순식간에 초원,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는 기반이 됐다. 집 없이 사방을 다니는 신속성에 간결한 정보력까지 갖춘 흉노는 이후 유목국가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흉노 이래로 초원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국가들이 발흥하며 끊임없이 역사를 바꾸는 주체가 됐다. 급기야 흉노 등장 후 1300년이 지난 시점에 등장한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도 기본적으로 흉노와 비슷한 조직이었다. 아시아는 물론 러시아 모스크바, 유럽까지 정복한 몽골 제국에서 메신저는 빠르게 정보를 이동시키는 역참으로 이어졌고, 몽골 제국의 성공의 비결이 됐다.


한자를 사용한 흉노

2020년 몽골 울란바토르대 발굴팀이 2200년 전 흉노의 성터에서 발굴한 올지스톰의 기와. ‘하늘의 아들인 선우, 영원히 복을 받으라’는 글자 11자가 새겨져 있다. T 이데르항가이 울란바토르대 교수 제공

후대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해보니 글자를 모른다는 중국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흉노는 한문을 잘 알고 있었고,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2020년 몽골 울란바토르대 발굴팀은 2200년 전 흉노의 성터를 발굴했다. 여기에서 ‘하늘의 아들인 선우(흉노의 왕), 영원히 복을 받으라’는 글자 11자가 새겨진 기왓장(막새기와)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집을 지으면 담벼락이나 처마 끝을 둥글게 장식하는 막새기와는 본래 중국 사람들의 전통이다. 그런데 흉노인들이 만든 기와에 새겨진 글자는 모두 11자인데 실제 중국에서는 이런 식으로 글자를 넣은 적이 없다. 또 내용도 흉노인들을 위한 맞춤형이다. ‘하늘의 아들 선우’라는 구절은 흉노인들이 자신들의 왕인 선우를 부를 때 외치는 ‘텡그리 후 샤뉘’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 중국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길상어(축복의 말)를 적절히 조합해서 흉노인의 기개를 드러냈다.

2200년 전 흉노의 성터였던 몽골 하르가닌 두르불진의 전경. 이곳에서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이 나왔다. T 이데르항가이 울란바토르대 교수 제공

사실 흉노인들은 원래 유목을 하고 한문을 널리 쓰지 않았다. 게다가 유목을 하면서 사방을 다니는 흉노에게 성은 별로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 성터의 기와는 흉노인들이 아마 중국이나 다른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맞이하는 용도였을 것이다. 외교사절단이 오면 보란 듯이 마치 플래카드를 걸듯이 명문의 글자를 걸어놓은 것이다.


메신저로 연애편지 보낸 선우

위 사진은 몽골 유목민의 말에 새겨진 기호(점선 안). 과거부터 유목민들은 이처럼 문서 대신 기호 등을 이용해 소통했다. 아래는 흉노 무덤에서 출토된 골제 주사위와 그 위에 새겨진 기호. 강인욱 교수 제공

그뿐 아니다. 흉노는 글자를 영악하게 외교전술에도 사용했다. 흉노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와 메신저를 적절히 이용해 중국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섣불리 흉노를 정벌하려다가 되레 크게 패하고 난 후에 중국은 저자세를 취했고, 흉노 역시 적절하게 대응했다. 당시 두 나라는 목간에 글자를 적어서 뜻을 주고받았다.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 죽고 난 후 그의 부인이었던 여후(呂后)가 정권을 잡았다. 수많은 부인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끝에 얻은 자리였으니 동양의 ‘블러디 메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기세가 등등했다. 그런데 권력자 여후를 흉노의 왕인 묵특선우(모둔선우)는 글자 그대로 음담패설 같은 메시지로 도발했다. “듣자 하니 그대는 과부라고 하고 나도 홀몸이라 재미없고 우울하니 우리 만나서 외로움을 달랩시다”는 내용이었다. 좋게 말하면 러브레터요, 나쁘게 말하면 저열해 보이는 외교적 도발이다. 당장 사신의 목을 치고 흉노와 전쟁을 벌이고 싶었겠지만, 당시 한나라는 흉노를 당해낼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방은 북방에서 글자도 없이 사는 유목민의 왕이다.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흉노의 왕이 ‘러브레터’를 만들어 보냈는데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여후는 분통을 억누르고 “내가 나이가 많아서 연애는 어렵고, 대신에 마차와 말을 보내니 즐겁게 노십시오”라고 달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흉노의 계책은 그뿐이 아니었다. 묵특선우의 다음 흉노 왕인 노상선우가 중국에 보낸 죽간은 길이가 1척 2촌(약 27cm)이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 황제가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죽간은 1척 1촌이었다. 흉노는 얄밉게도 중국의 황제가 쓰는 것보다 약 2.5cm가 긴 1척 2촌의 목간에 메시지를 써서 보낸 것이다. 흉노가 중국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를 메시지에 담아 전한 것이다. 이렇듯 흉노인들은 글자를 몰라서 안 쓴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효율적인 국가 통치를 위해서 쓰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에 글자의 효용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적절히 사용했었다. 한나라가 200여 년간 흉노에게 쩔쩔매고 매년 엄청난 양의 공물과 공녀를 바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고립 사회에 다시 돌아보는 메신저

어느덧 종이가 사라지고 우리의 모든 일이 메신저와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연락은 구두로 명령을 내리고 전령이 전하는 유목민 시대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십진법에 기초해서 운용되는 유목민 조직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의 소위 ‘단톡방’으로 정보를 공유한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과거 유목민의 메신저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량 정보가 메신저를 타고 넘나들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이제 메시지는 부차적인 게 아닌, 우리 삶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얼마나 건전하고 올바른 메시지를 받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글자 대신 메시지로만 유라시아를 제패했던 흉노에서 칭기즈칸에 이어지는 유목민의 지혜를 다시 돌아볼 때가 됐다. 메신저를 알고 메시지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21세기 승자가 될 것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