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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음으로 돌아가리라[클래식의 품격/나성인의 같이 들으실래요]

입력 | 2021-12-28 03:00:00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1815년 이후 베토벤은 작곡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청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조금 전인 1811년, 오스트리아는 전쟁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국가부도를 선언했고, 베토벤의 연금도 10분의 1 수준으로 가치가 하락했다. 사랑했던 여인과도 실연을 겪었다. 베토벤은 1812년 7월 ‘불멸의 연인’과 하룻밤을 보낸 뒤 딸아이를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 됨을 인정받지 못하자 그 트라우마가 망상을 촉발시켰다. 조카 카를을 아들로 삼아 상실을 보상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제수 요한나로부터 조카를 빼앗아 오겠다는 기괴한 소송전에 나섰다.

그러나 1819년, 베토벤에게 내면을 돌아볼 계기가 찾아온다. 그의 후원자요 작곡 제자인 루돌프 대공이 모라비아의 올뮈츠 주교로 임명된 것이다. 베토벤은 1820년 3월 9일로 예정된 주교 착좌 예식에 맞춰 미사곡을 헌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작품은 계획보다 3년 늦은 1823년 3월 19일에 세상에 나왔다. 베토벤은 대공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이렇게 썼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다시 마음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이 고백은 사실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장엄 미사’를 쓰는 와중에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한 과부를 짓밟았다. 요한나에게서 기어이 아들을 빼앗아 온 것이었다. ‘장엄 미사’를 헌정 받은 루돌프 대공은 재판에 개입했다. 유명인이 공권력을 이용해 약자를 억압한 스캔들로 대서특필 될 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베토벤의 ‘장엄 미사’는 진정한 고백적 음악이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를 따르는 칸타타 미사가 아니라 미사 통상문을 마치 교향곡 악장처럼 다룬 교향악적 미사였다. 깊은 내면성과 겸허함을 드러내는 ‘입례송’, 예배 음악을 넘어 화려한 종교음악 콘서트가 된 ‘영광송’, 예수의 일대기를 서사적으로 탁월하게 그려낸 ‘신앙고백’, 자유의 성령을 아름다운 바이올린 솔로로 그려낸 ‘거룩송’ 등이 놀랍게 이어진다. 마지막 곡인 ‘하느님의 어린 양’에서는 전쟁을 연상케 하는 투쟁적인 음악이 마침내 평화의 기도로 해소된다. “평화(pacem)!”라는 외침이 듣는 이에게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장엄 미사’ 초연 뒤 2년이 지난 1826년 7월 말, 베토벤의 조카 카를은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다. 베토벤은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뒤 진정한 뉘우침의 길로 들어섰다. 베토벤의 생애가 불과 반년쯤 남아 있을 때였다. 결국 그는 조카를 떠나보냈다. 제수와 동생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바로 그때에야 그의 음악은 ‘마음에서 나온 그대로’ 사람들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몇 개월의 사죄와 용서, 평화의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베토벤을 지금처럼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또다시 코로나와 함께 한 해를 떠나보내는 오늘, 베토벤의 평화를 기억한다.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