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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빚 물려받은 재민이, 사회 손길에 굴레 벗었다

입력 | 2021-12-29 03:00:00

[빚더미 벗어난 아이들]법률지원책 시행 한달




“석 달 새 부모를 연이어 잃고도 ‘혼자서 잘 살아보겠다’고 하더군요.”

경기 시흥시 연성동 행정복지센터 신미숙 복지팀장은 박재민(가명·17) 군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재민이는 올 7월 간암 투병 중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10월 어머니마저 숨지며 혼자가 됐다.

남은 건 부모님의 빚뿐이었다. 수년간 병원에서 지냈던 아버지는 개인회생 후 매달 18만 원씩 갚고 있었다. 어머니는 금리 연 10%의 카드론 450만 원을 남겼다. 재민이 통장으로 매달 기초생활 생계급여 55만 원이 들어오면 부채 상환 원금과 이자로 40여만 원이 빠져나갔다. 남은 돈으로는 먹거리를 사기도 어려웠다.

재민이 혼자 힘으로 빚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민법상 친척 등이 친권자로 지정된 뒤 재민이를 대리해 채무 상속 포기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재민이는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 재민이에게 최근 희망이 생겼다. 본보가 올 5월 ‘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 시리즈를 통해 빚의 대물림에 고통받는 아이들의 사연과 법의 허점을 지적한 뒤 정부가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 대책’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달 1일부터 부모 등 친권자가 사망하면 지방자치단체와 대한법률구조공단(구조공단)이 미성년자 유족의 채무 상속 포기를 일괄 지원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재민이를 만난 후 신 팀장은 6일 구조공단으로 ‘위기아동 법률구조 요청서’를 보냈고, 구조공단은 최근 이모를 후견인으로 지정해 상속 포기 절차를 밟고 있다.

신 팀장은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재민이에게 (우리 사회가) 적어도 빚부터 물려주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구조공단에 따르면 대책 시행 이후 채 한 달이 안 된 28일까지 10명의 아이가 이 제도를 통해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별도의 상속 포기 절차 없이도 미성년자가 재산보다 많은 빚을 물려받지 않도록 민법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프랑스와 독일 등이 이미 유사한 법을 시행 중이다. 본보 보도 전후로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백혜련 의원 등이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없이 반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