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시니어들
게티이미지
고령화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노인들로 북적거린다.
미국 통계국은 2015년 전체인구의 8.5%인 6억1700만 명에 달하던 고령자(65세이상)가 2050년경에는 전체인구의 17%인 16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에이지랩의 창시자 조지프 F 코글린 박사는 이를 “마치 대륙 하나가 바닷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장수경제학 2017, 한국판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부키)
인구구조 변화로 소비자 요구도 하루아침에 변해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소비가 급격하게 나타나게 된다. 세계 최고로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의 경우 전국 최대 안경체인점에서 판매 1위 상품은 돋보기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성인용 기저귀가 아기용보다 많이 팔린다.
○“노인은 무능하며 궁핍하며 이기적이다?”
‘거버 유아식을 자신이 먹기 위해 사가는 틀니 노인이 늘고 있다.’
하인즈사는 1955년 이런 보고가 이어지자 노인을 위해 미리 으깨어놓은 영양식을 개발하기로 했다. 당시 타임지 기사는 “미국에는 60세 이상이 2300만 명에 이른다”며 “아기는 대략 2년 동안 이유식을 먹지만 노인은 15년 이상 이 제품을 소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하인즈는 신상품 출시와 함께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지만 판매대에 쌓인 통조림에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버의 유아식을 사는 노인들은 “손주 먹일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지만 슈퍼마켓에서 이 통조림을 바구니에 담는 순간 “나는 가난하고 이빨도 성치 않은 불쌍한 노인네”라고 주변에 외치는 것과 같다.
결국 실패의 원인은 고령자에 대한 편견에 휩싸여 이들의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령자들은 자신이 노인이라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시장에서 자신들의 욕구에 맞는 대접을 받고 싶기는 하다. 어찌 보면 모순된 이들의 욕구를 읽지 못한다면 아무리 공을 들인 상품도 소비자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젊은 노인의 전성시대가 왔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20 세계경제 대전망’에서 “젊은 노인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며 더 건강하고 부유해진 시니어세대가 앞으로 소비재, 서비스, 금융시장을 휘두를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와튼스쿨의 마우로 기옌 교수는 2020년 저서 ‘2030 축의 전환’에서 “60세 이상이 전 세계 자산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며 “향후 10년간 세계의 중심축이 고령자와 여성,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이동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수경제학에서 코글린 박사도 노령담론이 지배하는 기업 현실에 문제 제기를 하며 ‘노인을 위한 시장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공통되게 지적하는 것은 수많은 기업과 언론이 젊고 역동적인 MZ세대를 공략하려 노력하지만 실제로 돈이 있고 소비력이 크며 인구가 많고 보유자산도 많은 세대는 욜드세대라는 것이다.
고려대 고령사회연구센터는 최근 발간한 책 ‘2022 대한민국이 열광할 시니어 트렌드’(비즈니스북스)에서 ‘에이지 프렌들리(Age Friendly)’를 새로운 트렌드로 꼽았다. 에이지 프렌들리란 고령자가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선보이며 그들이 원하는 바에 맞춰 전략을 구사하는 기업과 사회의 철학을 말한다. 이동우 고령사회연구센터장은 “앞으로 에이지 프렌들리 기업이나 브랜드, 도시와 지자체만이 성장하는 시니어 시장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며 “이제 고령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기업과 사회가 절대 성장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빨리 늙어가는 한국, 급속도로 달라진 시니어들
통계청이 최근 내놓은 2021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자. 2021년 3월 말 기준으로 가구당 평균 자산은 5억253만 원으로 전년 대비 12.8% 증가했다. 이 중 부채 8801만 원을 제하면 순자산은 4억1452만 원이 된다. 연령대별로는 50대가 5억6741만 원으로 가장 높고 다음이 40대(5억5370만 원), 60대 이상(4억8914만 원) 순이다.
복지부가 지난해 5월 발표한 ‘2020 노인실태조사’ 결과도 희망적이다. 조사 첫해인 2008년과 2020년의 고령자는 확연히 달랐다. 소득이 700만 원에서 1558만 원으로 늘었는데,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자산소득 비중이 늘어난 반면 가족의 보조를 뜻하는 ‘사적이전소득’은 46.5%에서 13.9%로 줄었다. 스스로 돈을 번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건강하다는 답변이 늘었고 학력 수준도 높아졌다. 정보화기기 사용능력을 가늠케 하는 스마트폰 사용자는 2011년 0.4%에서 56.4%로 급증했다(그래픽 참조).
시니어의 영향력이 가장 실감나는 분야는 문화 쪽이다. 7080 가요붐에서 트로트 열풍까지 이들의 존재감이 확인된다. 유튜브 이용자도 50대 이상이 가장 많다.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사들은 5060세대의 자산을 유치하기 위해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통계청 장래가구추계는 현재 167만 명인 고령자 1인 가구가 2047년 405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본다. 주거와 식재료, 각종 서비스 등에서 관련 시장이 커질 것이다. 인터넷 쇼핑과 검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버 서퍼’가 늘고 로봇과 인공지능(AI), 메타버스 등 정보화 기술의 최우선 수혜자도 고령층이 될 것이다.
다만 소비자로서의 고령자만 논하다 보면 다른 걱정들도 떠오른다. 2025년이면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가 된다. 어떤 생태계를 조성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고령화는 시장의 문제인 동시에 사회,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인사철, 너도나도 ‘젊은 조직’을 강조하며 사람을 잘라내는 풍조가 만연하는 현실이다. 인적자원이 한정된 나라에서 언제까지 지속가능한 방식인지 의문이다. 인구의 5분의 1이 뒷방 늙은이 취급받는 사회에서 과연 활력을 기대할 수 있을까. 고령자들의 역량과 에너지를 조화롭게 살리며 공존할 길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