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리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시유는 농장을 탈출한 고지능 돼지 만화를 그려 지오가 지나쳐 온 수많은 부조리와 맞서고 있었다.
함께 가출 팸을 독립해 셋방을 얻으면서 지오의 삶은 자연스럽게 시유를 닮아갔다.
수의학과를 목표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김 선생의 눈에 들어 센터의 관리사 보조 자격을 얻은 것도 모두 시유 때문이었다.》지오는 작업에 필요한 칼을 사서 일터로 향한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지오의 오토바이에는 여러 번 붙였다 뗀 영업용 스티커 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 있다. 열일곱에 가출 팸을 나온 뒤로 많은 일자리를 전전한 끝에 지오는 지금 동물 구조센터에서 일한다. 재활 관리사 김 선생의 보조 자격일 뿐이지만 긴급 상황이 발생할 때면 구조대원이나 간호사의 역할까지 해내야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지오는 틈틈이 휴대폰을 확인한다. 같은 팸에서 만나 교제했던 시유와 헤어진 이유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답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기껏 살려 놓은 돼지의 안락사 소식을 들은 것은 한낮의 사무실에서였다. 구조 동물의 생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선임 수의사의 고유 권한이다. 살려서 내보내거나 죽여서 내보내거나. 핸들링이 어렵고 밖에 나가도 제 구실을 못 해 죽음이 확실한 아이들은-수의사의 말을 빌리자면-경제적으로 죽여서 내보낸다. 수의사의 결정에 반대하는 자원 활동가를 보면서 지오는 처음 센터에 들어와 일하던 때를 떠올린다. 수의사에게 떼를 쓰던 시절이 지오에게도 분명 있었다. 지오는 오후에 방사 심사를 앞둔 매라도 살려보기로 마음먹고 날개를 다쳤던 매에게 최선을 다해 실리콘 쥐를 던져준다. 쥐는 매의 발톱과 부리에 닿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다. 방사가 불가능한 상태지만 지오는 매가 시험 사냥에 성공한 것처럼 김 선생과 수의사에게 거짓말을 한다.
지오의 성격을 이만큼 바꿔놓은 사람은 시유였다. 시유는 농장을 탈출한 고지능 돼지 만화를 그려 지오가 지나쳐 온 수많은 부조리와 맞서고 있었다. 함께 가출 팸을 독립해 셋방을 얻으면서 지오의 삶은 자연스럽게 시유를 닮아갔다. 수의학과를 목표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김 선생의 눈에 들어 센터의 관리사 보조 자격을 얻은 것도 모두 시유 때문이었다. 만화를 그리는 시유처럼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김 선생이 제안한 야간 아르바이트를 맡으면서 지오는 더 이상 구조센터의 안락사에 방방 뛰지 않게 되었다. 동물의 죽음은 새 아르바이트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밤에 지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일을 시킨 김 선생뿐이다.
시유가 유명한 정육점 집 딸이고,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생각해 보면 고기를 먹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었다. 한집에 살면서 지오도 집에서는 시유를 따라 채식에 동참했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채식을 한 건 아니었다. 김 선생이 주최한 회식 자리에서는 예전처럼 삼겹살을 먹었다. 지오는 채식주의를 욕보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같이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지 않으려고 플렉시테리언이라는 멋진 단어를 이용했다. 그리고 채식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하듯 자리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채식을 강요받은 적은 없었지만 고기를 먹는 날이면 은근히 시유의 눈치가 보였다. 그날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괜히 김 선생 핑계를 댔다. 시유와 사는 동안 지오는 종종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다.
결국 매를 방사하는 데 성공한 지오는 고작 말 한마디에 돼지는 죽고 매는 살았다는 사실, 익숙한 구조센터의 모순에 새삼 무거운 마음을 느낀다. 하루를 마감하고 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면서는 마음이 더욱 복잡하다. 높은 시급과 정규직 채용에 대한 기대로 김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문제였을까. 낮에 센터에서 동물을 구조하는 지오는 밤마다 김 선생의 진드기 연구를 돕기 위해 유해 조수를 잡으러 다닌다. 신종 감염증을 유발하는 진드기를 확보하려면 고지대에서 내려온 짐승의 가죽을 벗겨야 한다. 연구에 보탬이 돼서 센터의 안락사를 줄여보겠다고 시작한 지오의 아르바이트는 어느새 작은 희생을 동반하는 자신의 일이 인간 질병 예방에 크게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어설픈 합리화로 얼룩져 있다.
산촌으로 올라갈수록 가로등은 줄고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인적이 드문 경작지 부근에 차를 멈춘 동업자 아저씨는 그곳에서 두 번이나 놓쳤던 고라니를 노리고 있다. 저거 뭐지, 하는 아저씨의 음성과 동시에 지오도 밭에서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한다. 서치라이트를 반사한 물체가 김 선생이 필요로 하는 개체의 눈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지오는 예민하게 빛의 각도를 유지하면서 차 문 손잡이를 당긴다. 그때 다시 한 번 빛을 받은 안광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탕, 하고 아저씨의 베레타 엽총이 요란한 굉음을 냈다.
어쩌면 고라니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지오는 생각했다. 쓰러진 무언가를 향해 달리는 내내 이상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엉덩이를 맞고 비틀거리는 그림자는 노루였다. 더 나쁜 경우까지 상상했던 지오는 내심 안도하지만 사실 노루를 쏜 것도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노루는 고라니와 다르게 유해 조수 지정 동물이 아니다. 포획이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노루를 살려 보내려고 했지만 고통스러운 비명소리에 지오는 노루를 편하게 보내주기로 결심한다. 확실하게 끝내지 않은 아저씨가 원망스럽다. 확인 사살만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지오의 칼이 노루의 숨을 거두는 데 사용된다.
다른 경작지로 이동하는데 주민들이 나타나 차를 막아선다. 노루를 잡은 일이 드러날까 걱정하는 지오 앞에 예상치 못한 일이 펼쳐진다. 주민들은 농사를 망치는 노루를 잡아준 것에 환호하고 아저씨에게 돈을 주기까지 한다. 밭으로 달릴 때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눈덩이처럼 커진다. 문제를 제기하는 지오에게 동업자 아저씨는 말한다. 다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라고.
“너한테 나지 않던 냄새가 나.”
시유는 지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왜 한다고 했어? 예전처럼 그렇게 된 거야?”
시유의 질문은 어느새 아르바이트를 넘어 처음 두 사람이 만났던 팸 시절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어김없이 형들을 따라 저질렀던 지오의 비행들이 나왔다. 시유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왜 그런 짓들을 했어, 하는 흐름까지 가지 않으려면 지오는 자리를 피하거나 아예 더 세게 나가야 했다.
“너 그럴 만하니까 그랬던 거잖아. 네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
시유는 대화가 끊기고 한참 뒤에 그 말을 했다. 둘은 각자 휴대폰을 보다 샤워를 했고 같은 공간에서 티브이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자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기에 지오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시유가 했던 그 말을, 아저씨에게도 들었다. 말투는 완전히 달랐지만 내용은 같았다. 그 말은 그래도 될 때는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무방하니까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지오는 돈을 받고 노루를 쏜 아저씨에게 다시 한 번 맞서보기로 했다. 눈을 치켜뜨고 덤비는 지오를 바라보다가 아저씨는 말없이 엽총을 들었다.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바로 앞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압력이 가해진다. 지오는 뺨에 흐르는 물이 땀인지 피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차에서 뛰어내린다. 조금 전까지 노루를 동정했던 지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가죽이나 가지고 와.”
아저씨가 소리친 방향에 지오가 있고 더 멀리에 쓰러져 바둥거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지오는 그림자 가까이 다가가 질끈 눈을 감는다. 가죽을 자르려는데 차에서 소환되어버린 시유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시유의 말들이 만화 속 돼지의 목소리를 하고 머릿속을 떠다닌다.
지오는 그림자의 가죽을 잘랐다. 칼날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든다. 눈을 떴을 때 그것은 농작물의 줄기였고, 나무 부스러기였고, 난도질당한 흙과 뿌리와 썩은 잎사귀들이었다.
고개를 들자 정신없이 도망치는 그림자가 보인다.
아저씨의 서치라이트가 지오의 등을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
● 당선소감
사소하고 사적인 것들에 의지해 글 쓸 것
사소하고 사적인 것들에 의지해 글 쓸 것
이안리 씨
마감을 앞두고 작년 이맘때 써놓은 글을 많이 고쳤다. 문장만 다듬으려 했는데 거의 새로운 소설이 됐다. 원고를 인쇄해 놓고는 조금 망설였다. 문학상 심사평에 내가 쓴 소설이 실릴 때마다 거의 다 왔다고, 다음은 내 차례라고 생각하면서 원고를 보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문득 등단 제도가 나와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그랬더니 당선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그날 밤에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마음으로 버려진 문장들을 생각했다. 그 문장들이 어디로 갔는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생각했다. 아무것이 되거나 언제든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문장들.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쓰고 지우고 고치는 시간을 좋아했다.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글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곳까지 나를 데려다줬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서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방식으로 나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소리 내어 울어준 J 덕분에 마음껏 울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작은 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사소하고 사적인 것들에 의지해 써 나가겠다.
△1986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 심사평
현대사회 구조적 폭력성 섬세하게 포착해
현대사회 구조적 폭력성 섬세하게 포착해
최수철 씨(왼쪽)와 은희경 씨.
가족관계의 어긋남과 판매직의 고충을 교직해 구성한 응모작 ‘빛의 굴절’은 사소한 신변 이야기 같지만 실감을 더하는 디테일과 솔직한 이야기 전개가 공감을 자아냈다. 그러나 문장이 정돈되지 않고 일관된 주제를 향해 질서를 부여하는 플롯이 약해 완성도가 떨어졌다. ‘궁극의 세계’는 흥미로운 소재에 플롯은 안정돼 있으나 스토리와 캐릭터가 단선적이어서 예정된 결말을 벗어나지 못하고 소품에 머무른 느낌이었다. ‘작가란 무엇인가’는 표면적으로는 작가 지망생과 그의 조력자들을 둘러싼 사소하고 상투적인 에피소드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기득권과 클리셰의 세계를 야유하는 통찰이 깃들어 있다. 다만 중편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서사의 풍부함과 스케일에는 미치지 못한 듯해 아쉬웠다.
당선작은 ‘플렉시테리언’이다. 주인공은 낮에는 동물구조센터 보조로 일하며 동물들의 안락사와 방사 사이에서 고민하고, 밤에는 인간을 위한 진드기 연구 자료를 채집하기 위해 동물을 포획한다. 또 가출 팸에서 만나 함께 살게 된 연인의 영향을 받아 채식을 실천하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경우에 따라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을 택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설정을 기반으로 해서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윤리적 모순, 그리고 다수의 통념에 의해 회색지대로 내몰리는 심리적 갈등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안정된 문장, 개연성 있는 사건 전개, 실감 나고 정교한 세부묘사도 돋보인다. 특히 현대사회에 잠재해 있는 구조적 폭력성을 섬세하게 포착해 이야기의 질서를 부여하는 기량을 갖췄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최수철·은희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