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밥 짓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평범한 저녁 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딸의 환호성에 온 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신춘문예 문을 두드려 온 딸이 꼭 10년 만에 당선 소식을 받아든 것. 취업준비생 딸이 투고 사실을 알리지 않아 부모님의 놀라움과 기쁨은 더 컸다. 오랜 세월 고군분투한 딸을 부둥켜안은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채윤희 씨(27) 이야기다.
이번 신춘문예에서는 중편소설, 단편소설, 시, 시조, 희곡, 동화, 시나리오, 문학평론, 영화평론의 9개 부문에서 이안리(본명 이상훈·36) 김기태(37) 채윤희 김성애(59) 구지수(26) 김란(58) 이슬기(37) 최선교(26) 최철훈 씨(31)가 각각 당선됐다. 작가를 꿈꾸며 오랫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이들이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였다. 직업도, 나이도 각양각색이라 처음에는 서로 어색했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로 금세 이야기꽃을 피웠다.
중편소설 당선자 이안리 씨에게 소설은 마치 고백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첫사랑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글쓰기를 동경하던 그는 2018년부터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기본 생계를 위해 외국어 강사, 통역사 등 부업을 병행하는 ‘N잡러’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간 이 씨의 고충을 아는 가족과 친구들은 그의 등단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주변에서 진심으로 축하해줘 살짝 눈물도 났습니다.”
“떨어질 때마다 ‘예순 살 전에는 당선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여유를 찾고 다음 해를, 또 다음 해를 준비했어요.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시조 부문 당선자 김성애 씨는 전통문학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목욕탕 카운터에 앉아 짬짬이 습작을 하던 중 2019년 4월 암 발병으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어려운 와중에 날아든 당선 소식은 그와 가족 모두에게 큰 힘이 됐다. 김 씨는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 딸이 자신에게 건넨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고 했다.
“딸이 ‘나도 엄마처럼 자랑스러운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만큼 제가 누군가의 엄마이고 할머니인 게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달랐던 만큼 준비 기간도 천차만별이다. 수년간 투고 끝에 당선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첫 도전에 당선된 이도 있다. 문학평론 당선자 최선교 씨는 ‘초심자의 행운’을 붙잡은 사례. 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지난해 3월부터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첫 신춘문예 도전에서 성공을 거뒀다. 그는 “큰 기대 없이 원고를 보낸 거라 부모님께도 투고했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학원 과제로 쓴 평론 형식의 글들이 많았고, 동료 학생들과 꾸린 평론 스터디 모임도 당선에 한몫했다. 최 씨는 “같이 공부해 온 문우들 중에는 수차례 신춘문예에 도전한 이도 있어 등단 소식을 알리기가 민망하다”고 말했다.
동화 부문 당선자 김란 씨는 2005년 한 동화 모임에 참석한 후 그 매력에 흠뻑 빠져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다. 김 씨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신춘문예에 투고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아마 이번에 등단하지 못했더라도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원고를 보냈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번 등단으로 당선자들은 글쓰기에 날개를 달았다. 이들은 이 날개로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싶을까. 영화평론 당선자 최철훈 씨는 “그냥 책상 앞에 앉아 스스로의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 쓰는 평론이 아닌 현실적으로 좀 더 힘을 갖는 평론을 쓰고 싶다”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철학과 문학, 영화를 공부하며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게 습관이 됐다는 최 씨에게 등단은 그 자체로 목적이기보다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고 더 성장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8년의 습작기를 보내고 시나리오 부문에서 당선된 이슬기 씨의 각오는 오래 기다린 기회를 잡은 이답게 담백하고도 묵직했다. “사람들이 보고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그뿐입니다. 제 이야기에 매몰되기보다 읽는 이를 즐겁게 하는 글이 더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