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강력한 패’, ‘좋은 패’를 갖고 있으므로 미국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과도 등지지 않기 위한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유럽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가 진단했다.
라몬 파체코 파르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KCL) 국제관계학 교수 겸 한국국제교류재단(KF)-벨기에 브뤼셀자유대학(VUB) 한국석좌는 3일(현지시간) 뉴시스와 화상으로 진행한 신년 인터뷰에서 이 같이 분석했다.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유럽 지역에서 KF가 최초로 임명한 한국석좌로 한국의 외교 전략, 남북한과 미국·중국·유럽 관계 등 한반도 현안을 활발하게 연구해 왔다. 미중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유럽의 시각에서 미중 관계와 중국의 대외정책, 역내 질서를 바라보는 아시아통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선 일본·인도·호주와 구성한 쿼드(Quad) 4자 협력체를 한국 등을 추가해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5개국 첩보동맹)를 한국·일본·독일·인도를 포함시킨 ‘나인 아이즈’(Nine Eyes) 로 확대하자는 논의도 나온다.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쿼드가 안보 동맹에서 벗어나 백신, 반도체, 공급망 회복력 같은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양상을 고려하면 한국의 참여가 타당하다”며 “안보가 아닌 정치 혹은 경제적 동맹이라면 한국 입장에서도 동참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인 아이즈에 관해선 “중국에 국한된 게 아니라 함께 논의할 만한 다양한 보안 이슈를 다루는 자리가 될 테고 한국으로선 미국에 더해 유럽, 일본의 첩보까지도 접근이 가능해진다”고 분석했다.
이들 협력체가 노골적인 반중 노선을 취하지 않는 이상 한국은 자체적 대외 전략 차원에서라도 참여가 바람직하다는 평가다.
◆ “中과 마찰 불가피하지만 적대 관계 돼선 안돼”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한국의 미국 주도 협력체 참여 시 중국의 반발 가능성에 대해 “오늘날 중국이 한국에 가할 수 있는 경제 보복은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당시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이 경제 관계를 다변화했고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한중 경제 연결성도 약화했다”면서 “게다가 중국은 한국으로부터 반도체, 전기 배터리, 생물 공학 등의 기술과 상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중 마찰은 불가피하다. 이웃이지만 외교 관계에 대한 접근법이나 정치·경제 시스템이 다르기 때문”이라면서도 “중국은 계속 여기 있을 것이므로 적대 관계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와 중국과의 문제를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를 놓고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좋은 패’를 쥐고 있다”면서 “다른 나라들이 원하는 특정 기술을 보유했고 경제·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패를 가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 역시 모두와 나쁜 관계일 순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암묵적 美 선택…中 직접 비판하고 나설 이유 없어”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현재 미중 경쟁 구도에 대해선 “미중 양자가 아니라 미국 플러스(+) 파트너들과 더욱 고립되고 있는 중국이라고 본다”며 “한국이 공개적으론 아니어도 암묵적으로 이미 (미국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의 G7· 미국 주최 ’민주주의 정상회의‘ 참석, 동남아·호주·유럽 등으로 무기 판매, 세계보건기구(WHO) 코로나19 기원 조사 우려 성명 참여 등을 언급하면서 “말로 하지 않을 뿐 한국의 행동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3월에 있을 대통령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한국이 이런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문제는 한국이 중국 비판에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인가”라면서 “만약 그렇다면 다자 체계를 통해 할 수 있다. 한국이 직접 중국을 비판하고 나설 이유는 없다. 미국이 아닌 이상 어떤 나라라도 그렇다”고 말했다. 영국 같은 유럽국가들도 혼자보다는 G7 등 여러 국가의 모임을 통해 중국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설명이다.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미국이 이끄는 베이징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선수단만 보내고 공식 대표단은 불참)에 관해선 “중요한 정치적 제스처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론 별 다른 게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중국의 코로나19 국경 통제로 정치인 참석은 이미 어려운 상황이고 어찌됐든 선수들은 대회에 참가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은 중국이 바로 직전 동계 대회인 2018년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만큼 베이징올림픽을 보이콧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 “군사·경제력·소프트파워로 자주성↑…유사입장국 협력 강화”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한국이 추구해야 할 대전략으로 자주성 강화를 우선 꼽았다. 그는 “군사적 역량을 더 강화하고 경제력, 소프트파워(문화적 영향력) 활용을 확대하는 등 다양한 수단을 결합해 자주성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사 입장국들과 협력 강화 역시 자주성 확대에 필요하다”며 “가장 강력한 동맹인 미국은 물론 비슷한 외교정책 관점과 목표를 공유하는 유럽, 호주 등과의 협력 강화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엔,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다자주의 뿐만 아니라 쿼드, G7 플러스 등 소다자주의 협력체에도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그는 유럽에 관해선 “다자주의 같은 한국의 핵심 목표를 공유하므로 협력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또 “많은 유럽국이 인도태평양 내 핵심 파트너를 물색 중인데 한국과 일본이 제격”이라면서 “두 나라 모두 유사 입장국이자 민주주의에 능력을 갖춘 선진국이다. 인도는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 어렵고 호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대만은 정치적 제약이 있다”고 분석했다.
◆ “남북 화해 추구해야…北, 문 대통령 떠나기 전 제스처 있을 수도”
북한에 대해선 “남북 화해는 한국이 계속 추구해야 할 핵심적인 외교정책 목표”라며 “통일을 위한 길을 닦을 뿐만 아니라 보다 평화로운 한반도는 한국이 다른 외교정책 목표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관여 노력을 둘러싼 비판이 있지만 바람직한 접근법이었다고 평가했다.
파체코 파르도 교수는 “문 대통령 임기 종료 전 북한으로부터 일종의 제스처가 있을 수 있다”며 “이재명(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경우 (당선된다면)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지속할 테고 윤석열(국민의힘 대선 후보) 역시 북한과의 대화에 관심을 표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따라서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입장에선 한국과 관여 의향을 보여주는 것이 다음 대통령과도 누가 되든 시작하기 좋을 것”이라고 봤다.
다만 북한의 코로나19 국경 봉쇄를 감안할 때 남북 관계 진전이 있더라도 문재인 정부와 좋은 마무리를 하기 위한 제한적 수준일 것으로 예상했다.
[런던=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