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 산업2부 차장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은 ‘저러다 망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감하게 도전해요. 설령 망해도 책 한 권 쓸 정도의 경험은 남는다고 생각하거든요.”
최근 사석에서 만난 유학파 출신 스타트업 대표의 말처럼, 실패는 어떤 관점에서 대하느냐에 따라서 실패 그 이상이 된다. 적어도 ‘실패기’라는 새로운 콘텐츠라도 될 수도 있다. ‘스타트업의 거짓말’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렇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로 창업에 뛰어든 스타트업의 80%는 3년 내에 망해버린다. 하지만 실패에 아랑곳 않는 문화적 토양 위에서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기업들이 탄생했다.
글로벌 유수 기업도 이런저런 실패가 많다. 아마존의 대표적인 굴욕은 4년에 걸쳐 개발했으나 출시 4개월 만에 참패를 인정하고 철수한 스마트폰 ‘파이어폰’이었다. 재고처리 비용에만 1억7000만 달러(약 2031억 원)가 든 역대 가장 값비싼 실패였다. 하지만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는 담당자에게 “단 1분도 파이어폰 때문에 낙담해서는 안 된다. 단 1분도 잠을 설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말했다. 인사상 불이익도 물론 없었다.
실리콘밸리 문화에서 ‘빨리 실패하고, 자주 실패하라(Fail fast, Fail often)’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들은 실패에 관대한 문화에서 태어났고, 끊임없이 다음 도전(혹은 실패)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통해 혁신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때아닌 실패 예찬이 요즘 국내 유통업계에서도 화두다. 롯데와 신세계 두 수장이 최근 신년사에서 아이스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의 “시도조차 하지 않은 슛은 100% 빗나간 것”이란 말을 똑같이 인용하며 ‘실패 독려’에 나섰다. “실패는 뭔가를 시도했던 흔적”(롯데) “실패해도 좋다”(신세계)처럼 뒤에 이어진 메시지도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커머스로 재편되는 시장에서 두 유통 공룡이 느끼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그만큼 흡사했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은 이커머스의 소매시장 침투율이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소비시장 주도권이 온라인으로 넘어가는 추세는 훨씬 가팔라지고 있다. 아마존은 전문가들 예상보다 한 해 빠른 지난해 이미 월마트를 추월해 세계 최대 소매업체가 됐다. 새해 “실패하자”는 전통 오프라인 기업들의 부르짖음은 유통과 기술기업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뉴커머스 시대’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더 빨리, 더 자주 실패하며 성장하는 건 이제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만이 아니라 국내 기업들에도 당면 과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