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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中과 밀착하는 韓 우려… 한일 협력해 새 문명 만들어야”

입력 | 2022-01-06 03:00:00

[2022 새해특집/글로벌 석학 인터뷰]〈4〉 오구라 기조 日 교토대 교수
日, 韓경제 발전에 당황… 55년 협력 탄탄, 최악 아냐
美-中 문명충돌 벌이는 지금, 양국 함께 ‘매력문명’ 창출해야
大國이 세계 이끄는 시대 지고, 친환경-탈권위 등 가치 부상



동아시아 비교연구 분야 석학인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한일 양국이 지금까지 이뤄 온 협력 성과는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더 많은 협력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토=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양국이 만들어 온 협력 모델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문명 충돌을 벌이려는 지금 두 나라가 협력하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매력적인 문명을 만들 수 있다.” 동아시아 비교연구 및 사상 분야의 권위자인 오구라 기조(小倉紀藏·63) 일본 교토대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가 신년 인터뷰에서 최근 몇 년간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었지만 장기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는 낙관론을 폈다. 최근 갈등은 과거사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급부상, 중일 갈등 속에서 중국과 밀착하는 듯한 한국에 대한 우려 등이 결합한 결과이며 양국 협력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닌 몇몇 대국(大國)이 국제사회를 좌지우지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 친환경, 약자와 고령자 우대, 탈권위 등의 가치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며 두 나라가 이런 측면에서 미중보다 우위에 있다고 진단했다. ‘이(理)와 기(氣)’ 등 한국 철학에 정통하고 한국어가 유창한 그와의 인터뷰는 한국어로 이뤄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일 관계가 최악이다. 특히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2차 집권기(2012∼2020년) 때 갈등이 컸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을 앞지를 가능성을 보이자 일본이 당황했던 것 같다. 근본적으로 일본은 한국의 국력이 갑자기 이만큼 커졌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아베 전 총리와 주변의 보수 세력이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갈등이 커진 것 같다.

다만 양국 관계가 최악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1965년 국교를 정상화한 후 대립과 마찰이 있었음에도 결정적인 분쟁이나 전쟁은 없었다.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 양국은 경제, 문화, 정치, 외교,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층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해 왔다. 이 과정을 ‘한일 모델’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미 55년 이상 협력해 왔고 특히 경제계는 무수히 많은 협력을 했다.”

―일본 혐한파 또한 갈수록 늘어나는 느낌이다.

“혐한파는 1, 2년 전만 해도 온라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반일이니 안 된다. 싫다’고 했다. 요즘에는 아예 ‘더 강력한 반일에 나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환영한다. 그래야 일본이 한국과 완전히 단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제 질서를 모르는 피상적인 생각이다.

이는 한국과 중국을 동일하게 보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최근 일본에서는 중국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고립주의가 점차 커지고 있다. 이들은 ‘우리는 혁명 이데올로기 등 대륙의 이념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한국이 중국 쪽으로 갈 테면 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한국은 원래 중국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일본은 다르다. 섬나라이고 1000년 전부터 중국 문명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이를 반기는 일본인이 굉장히 많아지고 있다.

현재 일본은 중국을 매우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중국이 인권 자유 언론 등 기본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다수 일본인은 중국에 ‘믿을 수 없다’는 심정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을 혐한파들이 ‘한국은 왜 중국에 위기감을 갖지 않느냐’고 주장하면서 이용하고 있다.”

―과거사 논란을 두고 일본은 ‘국제법을 위반한 한국이 먼저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한다. 한국은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우선’이라고 맞선다.

“양측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 한국은 1965년 청구권 협정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고 일본은 이를 절대 어기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양측 모두 더 유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국은 ‘일본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나라’라는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 특히 일본 총리가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일본 또한 ‘1965년의 틀이 완벽하지 않기에 보완하려는 역사가 이어졌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1965년 협정을 맺을 때 양국 모두 반대했다. 한국에서는 ‘사죄와 반성이 없다’고 했고 일본 내 좌파는 ‘북한을 빼놓으면 어떻게 하느냐. 분단을 고정시키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타협해 협정을 만들어냈다. 이후 양국이 꾸준히 관리를 잘해 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전쟁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양국의 세계관 차이도 갈등의 원인일까.

“그렇다. 한국은 중앙집권 역사가 길고 고려시대 과거제도가 도입된 후 지식인이 주로 지배를 해왔다. 일종의 보편주의에 기초한 통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은 대륙적이지 않으며 특수주의에 가치를 둔 정치를 해왔다. 민주주의 등에 관한 정의와 개념 또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은 생활 전반에 관한 섬세한 개혁을 잘하지만 중앙 권력을 타도하는 것 같은 커다란 개혁은 잘 못한다. 양국의 이런 차이를 모르면 종종 오해가 생긴다. 하지만 세계관이 맞지 않다고 해서 단교할 수도 없는 게 이웃 국가다.”

―한일이 어떻게 협력하는 환경을 만들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이뤄온 한일 모델에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한일이 협력하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문화를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고 새로운 문명도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BTS가 일본 아이돌을 라이벌로 생각하기보다 협력을 한다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은 미국, 중국 등 초강대국만 만드는 게 아니다. 거대한 토지와 인구를 가진 대국(大國)이 약한 분야도 있다. 자연에 대한 섬세한 배려, 권위적이지 않은 통치, 약자와 고령자에게 우호적인 사회 등이 대표적이다. 21세기는 이처럼 섬세하고 작은 스타일의 문명이 요구된다. 미중 문명이 충돌하려는 이때 양국이 협력하면 세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매력적인 문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한일 관계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35년 동안 한 나라(일본)가 다른 나라(조선)를 지배했다. 양국 사이에 당연히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갈등이 없었던 서양은 식민 지배를 했던 국가와 피지배 국가 간 향후 심각한 대립과 마찰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한일은 1965년 이후 갈등 속에서도 서로 자제하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관계를 구축했다. 최근 한국이 경제적으로, 국제적으로 굉장히 많이 성장했다.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가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와 거의 대등한 관계가 됐다. 이는 세계적으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향후 베트남이 식민 지배를 했던 프랑스만큼 커진다면 1965년 이후의 한일 관계가 나침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일 갈등은 계속될까.

“일본은 군도(群島)의 문명을 가지고 있고, 중국은 대륙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 가족과 성(性)에 대한 규범이 다르다. 일본은 부계뿐 아니라 모계의 영향력도 무척 강하다. 중국 같은 대륙은 철저하게 부계 중심이다. 문명이 서로 다르니 갈등이 커질 수 있다.”

―최근의 미중 대립을 동서양의 문명 충돌로도 볼 수 있나.

“중국이 사상의 문제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런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인권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인권이 있다면 국권도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국가가 인권을 유린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서양의 근대 철학으로는 비판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이렇듯 양국의 대립이 경제 갈등을 넘어서고 있다고 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동북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은 처음부터 국가적으로 대응하면서 긴장감 있게 대책을 세웠다. 일본은 국민의 행동을 한국만큼 강하게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 코로나19보다 독성이 더 강한 바이러스가 발생하면 일본 또한 자유를 제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한국, 중국이 관련 정보를 공유하면 더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유럽 각국 또한 처음부터 사이좋게 지낸 게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탄, 철강 등을 어떻게 배분하고 공유하느냐를 놓고 매우 기능적인 관계를 만들었고 그러면서 점차 사이가 좋아졌다. 일본 한국 중국 대만도 바이러스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틀을 만들길 바란다.”


오구라 기조 교수는…
일본에서 동아시아 비교연구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오구라 기조(小倉紀藏·63) 교토대 교수는 1959년 도쿄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유명 광고회사 덴쓰를 다녔다. 1985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한국의 역동성에 매력을 느껴 서울대 철학과에서 석·박사 과정(동양철학 전공)을 밟았다. 한중일 3국의 사상 및 역사를 비교 분석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 ‘한국의 행동원리’ 등 명저를 다수 출간했다.

교토=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