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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북쪽으로 걸었다면 나의 계절은 봄이었을까”

입력 | 2022-01-08 03:00:00

◇두더지 잡기/마크 헤이머 지음·황유원 옮김/288쪽·1만7800원·카라칼




수십 년간 채식주의자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고기를 먹는 동생들을 비난하며 “사체 따위는 먹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그의 직업, 자기모순의 절정이다. 살생을 혐오하는 이의 직업은 ‘두더지 사냥꾼’.

저자는 시인이자 정원사다. 정원 일이 끊기는 겨울엔 들판과 농장 곳곳을 돌며 두더지를 잡는다. 농경지를 헤집어놓는 두더지는 농부들의 주적. 영국의 전통 직업인 두더지 사냥꾼들은 두더지의 습성을 이용해 돈을 번다. 먹고살기 위해 두더지 사냥꾼이 된 채식주의자 저자는 변명해본다. “인생은 좀처럼 우리의 기대만큼 단정하고 깔끔하지 않다.”

그는 가장 인도적으로 두더지를 잡겠다며 스스로와 타협한다. 두더지를 직접 죽이는 대신 덫을 놓아 스스로 죽게 하는 방법이다. 그는 곧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냥꾼이 된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선언한다. 더는 두더지를 잡지 않겠다고.

저자는 에세이 초반부에 두더지 사냥꾼을 그만두기로 한 ‘중대 결심’을 툭 던져놓고 답은 마지막에 알려주는 식으로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두더지를 둘러싼 자연환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60년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자연에서 배운 것들을 말한다. 두더지를 잡던 겨울과 더불어 열여섯 살 때 집을 나온 뒤 홈리스로 살며 한없이 걸어야 했던 이야기 등을 소설처럼 풀어냈다. “계절은 대략 시속 3km의 속도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한다. 만일 내가 계속 북쪽을 향해 걸었더라면 나의 계절은 영원히 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외로움을 담담하게 담아낸 문장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시인답게 삶과 자연에 대한 고찰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초연하게 담아냈다. 두더지와 자연, 인생, 전원에서의 일상이라는 섞이기 어려운 주제들을 맛깔나게 버무렸다.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 황유원은 노시인의 초연함과 고단함, 회한이 배어든 영어 문장을 한국어의 섬세함을 살려 번역했다. 문학적 번역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는 경험을 오랜만에 할 수 있는 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