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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 회장은 왜 ‘스토리’에 빠져들까?[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입력 | 2022-01-09 09:00:00

국가발전 프로젝트 ‘스토리’에 2억2900만원 상금… 商議 창업공모전 주관
방송 통해 창업 아이디어 스토리 전파, ‘사악한’ 대기업 이미지 불식
매출액 이익 재무지표보다 ‘파이낸셜 스토리’에 공감 얻으려




최태원 회장이 지난 해 중국 하이난에서 열린 ‘보아오포럼’ 온라인 행사에 참석해 설명하는 모습. 사진 SK그룹

지난해 3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스토리’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기업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출과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기업의 목표는 ‘주주가치의 극대화’라고 경영학 교과서에선 가르친다. 이윤을 내지 못하면 존립하기 어려운 것이 기업의 본질이다.

그런데 왜 최 회장은 매출과 이익 같은 재무지표, 즉 기업의 ‘숫자(number)’보다는 기업이 사회적 가치(social value)를 창출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따지는 ‘스토리(narrative)’에 집착하는 것일까? 기업의 사회적 책무와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최 회장의 대한상의 회장 취임 후 첫 작품인 ‘국가발전 프로젝트’를 보면 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6월 ‘국가발전 프로젝트 공모전’ 기자간담회에서 창업공모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송은석 기자



창업오디션 기획·연출한 ‘최태원 멘토’
지난해 6월 대한상의 최 회장이 첫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프로젝트 이름은 ‘국가발전 프로젝트 공모전’.

최 회장은 “코로나19로 모두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경제 활력 회복 방법을 몇몇 사람의 머리로만 고민하는 것보다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통해 집단 지성을 활용한다면 좀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공모전 취지를 밝혔다.

흔히 대한상의 같은 경제단체들은 대기업과 기업 오너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국민들 머리에 깊이 각인돼 있는 게 현실이다.

‘상속세 때문에 경영을 못 하겠다’, ‘강성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높은 법인세 때문에 장사하기 힘들다’ ‘규제가 얽매여 혁신을 하기 어렵다’ 등은 대기업과 최고경영자들의 대(對)정부 민원을 해결하는 ‘레퍼토리’로 통했다. 앵무새처럼 떠드는 이런 목소리에 일반 서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국가발전 프로젝트’ 창업공모전에서 최태원 회장이 참가자들과 나란히 섰다. 사진 대한상의

재계의 이익을 강조하는 경제단체에 국민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느냐’로 귀착됐기 때문이다. 이른바 반(反)기업 정서의 중심에 재벌 대기업과 경제단체가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최 회장은 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적 반감을 해소하기 위해 직접 창업공모전을 기획했다. 재계의 대변인 역할보다는 국민들의 참신한 사업 아이디어를 구하겠다는 전략이다. A4 용지 한 장에 사업 아이디어를 제출하면 대상 1억원 등 총 10편의 아이디어에 2억2900만원의 상금을 내걸었다. 사업제안 이유와 사업개요 기대효과 등을 담은 아이디어를 공모전 홈페이지에 제출하도록 하는 등 절차도 간단히 했다.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비즈니스에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프로젝트 제안서가 4700여개나 쏟아졌다. 국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창업 아이디어 공모전에 예상 밖의 지대한 관심이 모아진 것이다.

이 가운데 전문가의 심사를 통과한 50개의 창업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

대한상의는 미래 기술이 30%로 가장 많았고, 의료 복지와 환경 보전이 각각 25%로 절반을 차지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20%는 창업지원 플랫폼에 대한 아이디어였다.


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3월 대한상의 회장 취임식 대신 타운홀 미팅을 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유명 CEO 멘토링 거쳐 창업아이디어 사업화
대한상의는 30여 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서류 심사에 이어 20개의 본선 진출작을 추렸다. 국민투표단을 모집해 창업 아이디어 선정에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장치도 마련했다.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하기 위한 흥행 수단이었다.

이와 별도로 국내 대표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각 팀을 이끄는 멘토로 자원했다. 마지막 6개로 선정된 팀에 CEO 멘토가 따라붙었다. 최 회장을 비롯해 최정우 포스코 회장, 장병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 정경선 실반그룹 대표, 권명숙 인텔코리아 대표, 김현정 딜로이트컨설팅코리아 부사장이 멘토로 참여했다.

최종 본선까지 오른 6개 팀은 멘토에 따라 SK팀 포스코팀 크래프톤팀 인텔팀 딜로이트팀 등의 이름을 달았다. 멘토들은 사업 아이디어를 한번 들여다보는 정도가 아니라 전문가까지 동원해 10여 차례 미팅을 갖는 등 사업설계 단계부터 촘촘하게 도움을 줬다.

상의는 창업공모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 ‘대한민국 아이디어리그’라는 이름으로 SBS와 지역 민방을 통해 12월 중순부터 낮 시간에 80분 동안 전국에 방송하도록 했다. 방송에는 20여개 출품작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아이디어 선정 과정과 공모한 10여명의 심층 인터뷰, ‘톱6’ 선발전, ‘멘토-멘티’ 선발전 등을 소개하고 심사위원 멘토링 과정과 ‘올해의 아이디어’를 가리는 최종 라운드까지 담았다. 대국민 홍보전까지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거버넌스 스토리 워크숍에서 화상으로 대담하는 모습. 사진 SK그룹


당선작 6개 대한상의가 사업 추진
장장 6개월의 진행 끝에 대한상의는 연초 ‘국가발전 프로젝트’ 수상작 6개를 발표했다. 상금 1억원을 받은 1등은 ‘치매 막는 10분 통화’가 선정됐다. 16년차 직장인이 낸 창업 아이디어는 부모님께 전화 한통으로 치매진단검사(K-MMSE)를 몰래 실시하는 것이었다. 일상적 대화로 치매를 조기 발굴해 부모님과 부양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사회적 가치 창출 금액이 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치매 첫 증상 후 환자가 실제 병원에 가기까지 2년 반이 넘는 현실을 개선하는 사업 아이디어였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멘토를 맡았다.

2위는 최태원 회장이 15살 중학생 소녀와 손잡고 만든 전남 강진과 경북 상주 강원 영동을 잇는 테마여행 시제품으로 NFT(대체불가토큰)을 활용한 AR(증강현실) 보물찾기 사업 아이템이었다. 강진 가우도에서 풍어제 전설을 기반으로 ‘AR 물고기’ 게임을 즐기고 상주 임진왜란 격전지에서 NC소프트의 리니지 구슬을 얻는다는 스토리를 담았다. 멘토인 최 회장은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게임회사와의 공조와 지자체 축제와의 협업, NFT 규제 우회로 등을 조언했다고 한다.

3위를 차지한 ‘우리동네 병원’은 세브란스병원 의사인 김진현 씨가 제안한 것으로 저녁에 응급실이 아닌 병원을 활용하는 방안을 사업화하는 것이었다. 국민들이 낮 시간대에 진료 위치와 시간, 증상 등을 앱을 통해 요청하고 의사들은 이 앱을 확인해 야간 진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응급실 경증 환자가 많이 몰리는 시간이 오후 6시부터 밤 12시까지로 성인의 56%, 소아의 74%가 이 시간대에 몰리는 것을 해소해 보자는 취지다.

공동 3위를 차지한 ‘폐업도 창업팀’은 이태리 레스토랑 셰프인 백명기 씨의 아이디어로 722만에 이르는 자영업자가 따라할 수 있는 폐업 가이드를 만들어 바코드와 연동한 거래물품 정보 제공, 중고 묶음 플랫폼 활성화 등으로 자영업자의 재기를 도울 수 있도록 하는 사업 아이템이 꼽혔다.

6위에 뽑힌 ‘내 귀에 캔디팀’은 국민건강보험공단 5년차 직장인의 아이디어로 폭언에 시달려온 감정 노동자가 남자 친구인 AI 개발자와 합심해 비속어 차단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전화 통화에서 비속어가 나오면 자동으로 차단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연 500억원에 이르는 감정 노동자의 치유 비용을 줄이도록 하자는 것이다.

최 회장은 “수상작 톱6 사업 아이템을 대한상의에서 실제로 추진하고 한번 사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사업 아이템 제안자에게는 지분 4.5%를 주기로 했다.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프로젝트도 백서로 제작해 누구나 쉽게 들여다보고 사업 아이디어로 결실을 맺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규제 때문에 주옥같은 아이디어가 사장(死藏)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규제 샌드박스를 활용해 우회로를 찾는 방안도 모색하기로 했다.

국가발전 프로젝트 공모전에 참가한 사람들의 아이디어리그전 현장 모습. 사진 대한상의



사회적 가치 높이는 곳에 인센티브 주는 최태원의 경영 방식
최 회장이 ‘국가발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창업오디션을 기획 연출한 것은 SK그룹 경영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이 ‘돈 버는 기계’로 인식된다면 영구 존속하기 어려우므로 사회 문제를 푸는 일에 기업이 앞장서야 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이 뿌리다. SK그룹은 2015년부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회사를 해마다 40~50개를 선정해 ‘인센티브’라는 명목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한 기업 당 평균 5000만원 안팎의 상금이다. 본업과 연계하면서 환경, 고용, 사회 서비스 및 사회 생태계 등 사회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회사를 발굴해 포상한다.

여기에는 기업의 고유한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어떻게 환경을 보호하는 데 기여했고, 사회적 약자의 고용을 창출하는 데 어떻게 힘썼는지에 대한 경영 스토리면 충분하다. 최 회장의 대한상의 총 사령탑으로 첫 작품인 ‘국가발전 프로젝트’ 역시 궤를 같이 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매몰되지 않고 국민들이 편안한 나라가 되는 데 창업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업 아이템이 구체화되며, 이것이 사회 문제를 푸는 데 거름이 되도록 상의가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려는 시도다. 이 사업은 올해도 이어진다.

지난 해 SK그룹의 경영 화두(話頭)는 ‘파이낸셜 스토리’ 창출이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 등 재무성과를 중심으로 한 기업 가치에서 벗어나 매력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담긴 ‘파이낸셜 스토리’로 시장에서 신뢰를 얻어야 기업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고 최 회장은 강조한다. 이런 그룹 최고경영자의 방침에 따라 SK CEO들은 고객과 투자자, 시장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회사의 성장 스토리를 제시하고 공감을 얻어내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지난해 최 회장은 상의 부회장단에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박지원 두산 부회장 등 IT(정보기술) 업계와 금융계 및 재계의 ‘젊은 피’를 대거 수혈했다. 2년차를 맞는 최태원 호(號) 대한상의가 ‘국가발전 프로젝트’에 이어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데 어떤 작품을 내놓을 지 관심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22년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 최태원 회장이 시대 변화에 따른 기업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동주 기자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