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 삶 견딘 서민 담아낸 박수근 생활 풍경 ‘오징어게임’에 녹인 황동혁
손효림 문화부장
“아버지가 주목한 건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식민 지배, 6·25전쟁, 정치적 소용돌이에도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고 행상에 나선 이들이었지요. 역사의 고비마다 상처를 입었지만 묵묵히 일상을 살아간 이들이 생명을 품고 이어지게 한 존재였으니까요.”
화가 박수근(1914∼1965)의 장남 박성남 화백(75)은 아버지의 작품 세계는 ‘상처의 미학’으로 볼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3월 1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에 대해 최근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자주 봤지만 팬데믹으로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시기에 열린 이번 전시는 더 반가웠다. 절구질하는 아낙, 아기 업은 소녀, 빨래하는 여인들…. 척박한 현실을 견디는 이들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은 맑고 따뜻하다.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 화강암 표면처럼 울퉁불퉁한 특유의 질감을 지닌 작품들. 박성남 화백은 “그림 표면은 오돌토돌 튀어나왔지만 아버지가 그린 이들은 오목하게 팬 듯한 존재”라고 했다. 아래로 움푹 들어간 곳이어야 흙이 담기고 물이 고이며 빛이 스며들어 비로소 생명이 움틀 수 있다는 것. 그래서일까.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전염병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말없이 자기 몫을 다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다가온다.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산으로 들로 달려 나갈 때면 당부하던 할머니의 말도 영화 ‘남한산성’의 마지막에 활용했다. 고아가 된 소녀 나루를 키우는 대장장이 날쇠(고수)가 놀러 나가는 나루에게 “너무 멀리 가지 마라”고 한 것. 나루가 ‘초경을 흘리는’ 것으로 원작 소설 ‘남한산성’을 마무리했던 김훈 작가(74)는 이 대사를 듣고 무릎을 쳤다. 김 작가는 생명성을 소설 마지막에 어떻게 표현할지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툭 던지는 것 같지만 애정이 담긴 이 말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 후에도 삶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음을 은근하게 보여 준다”고 감탄했다.
지난해 교보문고가 발표한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 1위에 오른 윤성희 작가(49)의 단편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에는 각각의 방법으로 ‘가슴속 구멍’을 발랄하게 메우는 평범한 이들이 나온다. 욕설이 늘어나고 점점 지질해지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할머니는 밤에 킥보드를 타기 시작한다. 오빠들 이름을 따라 돌림자를 붙여 ‘병자’라는 이름을 가진 데다 아픈 어머니를 홀로 돌봤던 여성은 50대에 퇴직하자마자 이름을 ‘지원’으로 바꾸고 공원 분수대에서 옷이 흠뻑 젖도록 논다. 이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은 때로 엉뚱하지만 유쾌하다.
박성남 화백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하얀 셔츠를 입은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이 거의 없으셨어요. 하지만 작품을 통해, 또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싼 작품이 아니라 사랑을 남겨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박수근 화백이 사랑을 보낸 대상은 가족뿐 아니라 삶을 견디는 필부필부(匹夫匹婦) 모두가 아닐까. 황 감독과 윤 작가가 바라본 이들 역시도. 평범한 우리를 보듬어 주는 예술이 있어 다행이다.
손효림 문화부장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