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며 미소 양극체제가 붕괴됐다. 경제강국 일본도 플라자 합의와 슈퍼 301조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최소 한 세기는 넘게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30년 만에 세계는 다시 격렬한 패권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치닫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힘을 키워온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중국은 올해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통해 미국에 맞설 또 다른 패권국가로의 부상을 준비 중이다.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한 서구 동맹국들과 초대장은 받았냐며 대응하는 중국의 사이에서 한국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이처럼 ‘안보’와 ‘경제’라는 배타적인 두 축 사이에서 세계는 합종연횡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 지정학적 딜레마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국에는 한층 고차원의 해법이 요구되고 있다. 국제 정치의 엄혹한 현실 아래서 한국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안보와 경제의 공통분모인 ‘기술주권’을 확보하는 것뿐이다.
아무리 우리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세계 1, 2위 강국과의 기술패권 경쟁은 결국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규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더 밀도 있게 지혜와 역량을 응집할 수 있는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차기 정부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강력한 과학기술 거버넌스로 ‘과학기술 부총리’의 부활을 전격 제안한다. 붉은 여왕 효과가 가속화되는 시대의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는 연구개발의 방향과 예산을 총괄하는 것을 넘어 국정 전반에 과학기술 전문성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정무적·재무적 관점에 얽매인다면 외부 환경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다. 2004년 과학기술부를 부총리급으로 격상했던 4년간 상승세를 탄 한국의 생산기술 경쟁력은 세계 2위까지 올라갔었다.
양자컴퓨팅, 차세대반도체 등 최첨단 미래기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테이블세터가 되지 못한다면 기술 주권도 없다. 경쟁국에 한참 모자라는 투자로 모든 분야에서 초격차를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어불성설이다. 군사작전에 비유한다면 다양한 각도에서 한 지점에 화력을 집중해 전선의 연쇄적인 균열을 유도하는 ‘TOT(time on target)’ 전략이 효과적이다. 기업, 대학, 정부출연연구소 등 모든 혁신주체들의 역량을 결집해 입체적으로 화력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야전 사령부가 필요한 이유다.
윤석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