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새 인사를 위한 제언] 대통령 인사권 몇 명인지도 불분명… 역대 정권 ‘우리편 챙기기’ 악순환 美 ‘플럼북’ 9000여개 공직 명시, 임명조건 명확히 규정해 투명인사
대선 과정에서 사람은 후보에게 곧 ‘표’다. 하지만 대선을 마치고 나면 고스란히 ‘자리 청구서’로 돌아온다. 역대 정권마다 되풀이되는 ‘대선 공신(功臣)’에 대한 논공행상 인사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이번 대선에서는 각 캠프 규모가 5년 전 대선보다 방대해지며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전리품 인사’가 더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 같은 악순환을 끊기 위해 정부 주요직에 대한 인사 설계도를 만들어 공개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온다.
미국의 인사지침서인 ‘플럼북(Plum Book)’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플럼북을 통해 대통령이 임명권을 갖는 연방정부 9000여 개 직책을 열거하고, 각 직책의 임명 방식과 조건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대통령 인사권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부터 불분명하다.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청와대에서 인사 검증을 하는 자리를 모두 포함하면 대통령의 인사 영향력이 수천 자리에 이른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인사를 기용하는 것은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책임인사’라는 미명 아래 국정과제 이행과는 무관한 자리에까지 무분별하게 ‘낙하산 인사’를 내리꽂는 게 현실이다. 특히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보듯 ‘우리 사람’을 챙기려 청와대가 법에 규정된 인사 절차를 무력화하는 일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전문가들은 인사 참사를 끊어낼 제도적 틀로 ‘한국판 플럼북’을 제안한다. 김동극 전 인사혁신처장은 “규정된 자리에는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춘다는 전제로 대통령의 인사권을 보장하되 나머지 자리에는 청와대의 개입을 막아 인재를 널리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 인사범위 7000개? 1만개?…“명확히 규정할 ‘플럼북’ 필요”
새 정부, 새 인사를 위한 제언 〈상〉대통령 영향력 미칠수 있는 자리, 몇개인지조차 모를정도로 불분명
대통령 인사권 범위 규정 없어… 대선후 ‘내 사람 챙기기’ 반복
문학인이 공원관리공단 낙점도… “인사 왜곡 차단, 플럼북이 해법
임명 절차-조건 등 명확히 정해야”
진보, 보수정권에 걸쳐 대통령인사수석비서관실에서 일한 전직 공무원은 지난달 31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공공기관 임원 자리에 ‘낙하산 인사’를 보내기 위해 대통령의 묵인하에 각종 편법, 불법이 행해진다는 얘기다.
노무현 정부 ‘코드 인사’, 이명박 정부 ‘고소영·강부자 인사’, 박근혜 정부 ‘수첩 인사’, 문재인 정부 ‘캠코더(대선 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 역대 정부는 예외 없이 진영, 출신 등에 기댄 좁은 인재풀에서 사람을 쓴다는 논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사람 챙기기’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대통령 인사권이 닿는 범위에 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정부, 공공기관을 넘어 민간 영역에 이르기까지 1만 개를 훌쩍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권 실세가 뒷전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각종 인사 악습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 靑 인사검증만 7000여 자리
대통령인사수석·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일한 복수의 인사에 따르면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는 70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와대가 인사검증을 하거나 관심을 두고 ‘관리’하는 자리는 1만 개가 넘는다는 추정도 나온다. 정확한 숫자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불투명한 인사가 진행된다는 뜻이다.대통령은 헌법상 공무원에 대한 임면권을 갖지만 사실 직접적 인사권은 정부 부처 장차관 140여 명, 공공기관 임원 200여 명 등으로 제한된다. 특히 공공기관 임원에 대해서는 해당 기관의 자체 절차를 거쳐 추천된 최종 후보 3명 중 1명을 임명하도록 해 인사권 남용 방지 장치도 뒀다. 하지만 인사수석 출신의 한 인사는 “한국전력이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이 공모를 통해 아래서부터 올라왔다고 믿을 국민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까지 ‘내 사람’
대통령 인사권의 범위가 불투명하다 보니 각종 ‘짬짜미 인사’도 벌어진다. 지난해 2월 ‘환경부 블랙리스트’ 1심 판결문은 정권의 ‘내 사람 심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각종 공공기관에 ‘청와대 몫’, ‘장관 몫’으로 점찍은 인사가 최종적으로 낙점되도록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법 규정상의 절차를 무력화한다.일각에서는 국정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공유한 ‘내 편’의 기용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문제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이나 국정과제와는 사실상 연관이 없는 자리까지 청와대가 논공행상하듯 인사 개입을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대통령균형인사비서관이 ‘보은인사’를 위해 부당하게 개입한 것으로 드러난 기관에는 한국환경공단, 국립공원관리공단,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등이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에는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문학인’에 이름을 올린 인사가 최종 낙점됐다. 환경부 공무원들은 이 인사의 자기소개서와 직무수행서까지 대신 써줬다. 한국환경공단 상임감사 자리의 경우 내정된 진보 성향 언론인이 서류심사 단계에서 탈락하자 신 전 비서관이 환경부 담당자에게 소명서를 내라고 질책했다.
비단 환경부만의 일이 아니다. 인사수석실 출신의 한 인사는 “장차관 등이 산하기관 임원추천위원들에게 압력을 가한다든지 크게 오버해야 외부에 불거지는 것이지 ‘환경부 블랙리스트’ 같은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 ‘한국판 플럼북’으로 인사 정상화해야
전문가들은 ‘인사=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인식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 같은 인식이 폭넓은 인재 등용을 가로막는 제1의 걸림돌이기 때문. 특히 대통령이 수천 개의 자리를 세세히 들여다볼 수 없는 현실에서, 소수의 권력 실세들이 대통령의 이름으로 부당하게 인사 개입을 하면서 내부의 ‘줄 세우기’와 권력투쟁이 이어진다.왜곡된 인사 관행을 막기 위해 ‘한국판 플럼북(Plum Book)’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한다. 미국의 정무·고위직 인사지침서로 활용되는 ‘플럼북’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직책을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 주요 직책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보장하되 임명 절차나 조건 등을 투명하게 밝혀 권한을 자의적으로 쓸 수 없도록 하자는 취지다.
문재인 정부 초대 인사혁신처장을 지낸 김판석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교수는 “어떤 정권이든 대선 캠프 인사들을 기본 인력풀로 삼는다”며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대통령이 관여할 수 있는 자리와 부처에 맡겨야 하는 자리의 범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박효목 기자 tree624@donga.com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플럼북(Plum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