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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법 조항 모호해 불안… 안전 예산-조치 얼마나 어떻게”

입력 | 2022-01-12 03:00:00

[현장과 겉도는 중대재해처벌법]〈상〉법 시행 15일 앞두고 기업들 혼란




11일 부산 강서구 녹산공단에 자리한 금속 도금 업체 동아플레이팅. 공장 안쪽에 작은 길이 있다. 지게차가 하루 50t의 금속을 싣고 이 길을 오간다. 노란 선만 그어져 있던 이 길은 지게차가 다닐 때마다 경보음이 울리며 밝은 조명이 켜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빨간색 조명이 지게차 주변을 따라 움직이며 접근 금지 구역을 표시한다. 직원들이 지게차 접근을 알아차리도록 안전신호를 강화한 것이다.

이오선 동아플레이팅 대표는 “지난해 안전관리 예산을 연간 매출액 60억 원의 10%인 6억 원으로 늘렸다”고 했다. 안전 설비를 보강하고 전담 임직원 3명을 두는 등 준비를 마쳤지만 이 대표는 여전히 불안하다고 했다. 이 대표는 “안전한 사업장을 바라지 않는 사장이 어디 있겠나”라며 “사고가 나면 무조건 사장 책임이라는 건 너무한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보름 앞으로 다가오면서 기업들의 불안과 혼란이 증폭되고 있다. 동아플레이팅처럼 매출의 10%를 시설 및 인력에 투자해 안전관리를 강화한 기업들조차도 모호한 법 조항 탓에 “언제든 걸릴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어서다.
○ “안전관리 대비했지만 처벌 못 피할 수도…”

11일 부산 강서구의 도금업체 동아플레이팅 작업장에서 이오선 대표가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마련한 작업용 지게차 안전 대책을 소개하고 있다. 왼쪽의 지게차 아래 주변에 사각 모양으로 둘러진 빨간색 실선 빛은 작업자가 운행 중인 지게차와 부딪히는 걸 막기 위해 안전구역을 표현한 것으로, 이 대표가 관련 기술을 가진 업체를 수소문해 적용했다. 부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본보는 한국경영자총협회와 함께 이달 5∼8일 국내 50인 이상 기업 106곳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11일 설문 결과에 따르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 안전, 보건 분야에서 완료하도록 돼 있는 9가지 항목의 경영책임자 의무사항을 모두 완료했다는 기업은 32.1%에 불과했다. ‘대부분 이행’이 46.2%, ‘일부만 이행’은 21.7%였다.

경총 관계자는 “기업들은 지난해 1월 법이 제정된 후 1년간 나름대로 안전관리 투자를 늘려왔지만 ‘완료’의 기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사전 의무사항 9가지 중 한 가지라도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각각의 조항들에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사전 의무를 모두 이행하지 못했다는 기업들이 밝힌 이유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43.4%)”와 “의무 내용이 불명확해서(28.3%)”가 가장 많았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하거나 같은 사고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할 경우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는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사고가 발생하면 고용노동부가 1차로 사업주 등이 안전관리를 위해 충분한 조치를 했는지를 파악한다. 사업주가 안전보건에 필요한 예산을 제대로 편성·집행했는지, 중대재해 발생 시 매뉴얼은 마련했는지, 안전 업무 전담조직을 만들었는지 등을 점검한다.

문제는 사고가 발생한 뒤 책임 소재를 거꾸로 찾아 들어가는 구조다 보니 사업주가 사전에 사고 예방을 위한 충분한 조치를 취했다고 해도 정부 점검에서 “불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기업들이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고도 불안에 떠는 이유다.
○ “구체적 기준 보완 때까지 시행 유보해야”

기업들은 불안해도 답을 찾을 곳이 없다.

수도권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 제작 업체 A사는 지난해 법무법인을 통해 안전관리 컨설팅을 받았다. 이달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어떤 것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였다. 컨설팅 비용으로 수천만 원, 안전용품 및 시설 개선 1억여 원 등 2억 원 남짓을 썼다. 그래도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다. A사 관계자는 “규정에 안전관리 예산을 마련하게 돼 있는데 그 예산이 얼마가 돼야 충분한지 정부조차 모르더라”며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예산 부족이 꼬투리 잡히면 꼼짝없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기업마다 경영 상황이 달라 예방조치를 사전에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대표가 자리를 비우면 사실상 폐업 위기에 몰리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불확실성 자체가 가장 큰 위협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본보와 경총의 설문에서도 응답 기업의 39.6%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잘 이행하기 위해 ‘불명확한 경영책임자 의무 범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고 답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신규 임원 선임이나 법률 자문에 쓰는 대기업의 막대한 예산이 차라리 중소기업의 안전실태 강화에 쓰이는 게 사회적으로 더 나을 것”이라며 “규정과 기준이 모호하면 결국 행정기관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될 우려가 큰 만큼 시행령을 통해 구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세부 조항을 마련할 때까지 법 시행을 유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산업재해를 줄여야 한다는 법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라도 3년가량의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며 “실제 산업 현장의 실정에 맞는 구체적 기준을 마련해 세부 시행령 등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