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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철희]조종사 잡는 전투기

입력 | 2022-01-13 03:00:00


1950년대 말 냉전이 무르익던 시절,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제2세대 전투기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고성능화 경쟁도 한층 가열됐다. 강력한 엔진과 최신 레이더, 신예 무기를 갖추다보니 덩치가 커진 반면 기동력은 떨어졌고 가격도 매우 비싸졌다. 서방의 맹주 미국엔 고성능 막강 전투기가 필요하겠지만 다른 개발도상국 동맹국들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런 틈새를 내다본 방위산업체 노스럽사가 기존 고등훈련기를 토대로 개발한 ‘꿩 대신 닭’ 격인 전투기가 구매가격도 운용비용도 저렴한 초음속 경량 전투기 F-5A/B ‘프리덤파이터’였다.

▷인기 높은 수출 기종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은 F-5A는 1965년 한국에 처음 도입돼 한국군의 초음속 전투기 시대를 열었다. 1972년부터는 성능을 향상시킨 F-5E가 나와 한국도 추가로 구매했다. 하지만 F-5E는 당시 북한이 보유한 미그-19나 미그-21보다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가에 시달렸다. 그래서 추진된 차세대 전투기 F-16 구매사업이 자금 압박으로 물량이 축소되는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서 F-5E/F가 198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조립 생산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은 전 세계에서 F-5 기종을 가장 많이 운용하는 국가가 됐다.

▷11일 오후 경기 화성의 한 야산에 F-5E 한 대가 추락했다. 이 전투기는 이륙 직후 좌우 엔진 화재 경고등이 켜지고 기체가 급강하했다. “이젝트(탈출)! 이젝트!” 조종사는 관제탑과의 교신에서 비상탈출을 두 차례나 외쳤으나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추락 지점은 주택 몇 채가 있는 마을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이었다. 조종사가 민가로 추락하는 것을 피하려고 야산 쪽으로 기수를 돌리면서 탈출 시기를 놓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지만, 워낙 낡은 기종이어서 수리 부품조차 다른 전투기에서 빼내 돌려쓰는 판에 탈출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을지나 모르겠다는 얘기도 들린다.

▷공군이 보유한 F-5 기종 80여 대는 통상 30년 정도인 정년을 훌쩍 넘긴 노후 전투기다. 2000년 이후에만 모두 12대가 추락했다. 이번 사고기도 운용한 지 36년이 됐다. 공군은 F-5 기종을 한국형 전투기 KF-21로 대체해 2030년까지 도태시킬 계획이다. 영공 방어를 위한 ‘전투기 적정 대수(430여 대)’ 유지 차원에서 퇴역 시기를 넘겨 운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공군은 설명한다. 초계 임무 같은 보조전투기로서의 역할이 있고 조종사의 비행시간 확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뭉치 기종을 넘어 ‘조종사 킬러’ ‘과부 제조기’로 오명만 쌓는 상황을 앞으로도 8년간 지켜봐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