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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토냐’에서 사전트의 ‘마담X’가 떠오른 이유[움직이는 미술/송화선]

입력 | 2022-01-14 03:00:00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X’.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송화선 여성동아 차장


‘마담X’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머리를 틀어 올려 하얗고 긴 목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이 여인의 초상화 앞엔 언제나 관람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는 1884년 프랑스 사교계에서 인기 있던 한 여성을 모델로 이 작품을 그렸다. 여인은 머리에 얹은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제외하곤 별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우아한 검은 드레스를 잡고 있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지가 반짝인다. 남편이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19세기 말 유럽 상류사회 사람들 사이에서 이 그림은 공개 즉시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결혼한 여성이 어깨를 훤히 드러낸 채 요염한 포즈로 화가 앞에 섰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내였던 고트로(Gautreau) 부인은 졸지에 불량한 행실의 소유자로 낙인찍혔고, 구설에 오르내리다 끝내 사교계를 떠났다. 이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사전트의 아틀리에에 걸려 있던 이 작품은 1916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고트로 부인 사망 후 1년 만이다. 당시 사전트는 미술관 담당자에게 남긴 메모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것이 내 모든 작품 가운데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화가는 작품 속 여성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제목을 ‘마담X’로 붙여 달라고 당부했다.

사전트 또한 이 그림 발표 직후엔 악평에 시달렸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그는 어린 소녀를 모델로 한 유화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선보이며 큰 명성을 얻는다. 오늘날 사전트의 이름은 미술사에 영광스럽게 기록됐다. 반면 ‘마담X’의 존재는 한 장의 이미지로만 남았다. 이 우아한 여인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사전트 앞에서 포즈를 취했고, 갑작스러운 사교계 퇴장 뒤 30년 넘게 이어진 암흑의 삶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

영화 ‘아이, 토냐’를 보다 이 작품이 떠오른 건 주인공 토냐 하딩의 신산한 삶 때문일 것이다. 하딩은 미국 최초로 공식 대회에서 트리플 악셀(3회전 반 점프)에 성공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다. 탄탄한 허벅지 힘으로 그 어떤 경쟁자보다 높이 뛰어올랐고, 공중에서도 힘차고 빠르게 회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하딩의 이름은 이 빛나는 성취와 함께 거론되지 않는다. 1994년 발생한 동료 선수 폭행 사건의 가해자로 몰려 빙판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한 영화 ‘아이, 토냐’에서 하딩 역을 맡은 배우 마고 로비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여러 차례 이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 장면을 보다 문득, 시간을 되돌려 19세기 유럽으로 갈 수 있다면 ‘마담X’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로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앞에 닥친 재앙의 실체에 대해 들을 수 있다면, 이 여인에게 자기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송화선 여성동아 차장 sp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