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유대인/슐로모 산드·김승완 옮김/670쪽·3만4000원·사월의책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동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 모여 기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요르단 영토였던 이곳 주변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저자는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유대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사월의책 제공
1962년 가톨릭 수도사 슈무엘 루페이센은 자신을 “유대인으로 인정해 달라”고 이스라엘 대법원에 청원했다. 폴란드의 유대인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자신을 뼛속까지 유대인으로 여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맞서 싸운 그는 ‘민족의 땅’ 이스라엘에서 여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종전 후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 발목을 잡았다. 폴란드 시민권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에 온 그에게 대법원은 청원 수용 불가를 통보한다. 어머니가 유대 혈통이거나 자신이 유대교 신자이어야만 유대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저자는 유대 민족의 허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판결을 꼽는다. 루페이센은 평생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믿었지만 ‘민족 불명’이라는 신분증을 갖고 살아야 했다.
유대인으로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자기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도발적 주장을 내놓는다. 유대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조작됐다는 것. 이 책이 나오고 그는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공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동료 교수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영국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가장 용감한 올해의 책”이라고 평한 이유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가계도 눈길을 끈다. 동유럽계 유대인이 쓰는 이디시어를 사용한 그의 아버지는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공산주의자였다.
미국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이 근대 민족의 허구를 밝힌 ‘상상의 공동체’를 1991년 펴낸 후 관련된 비판적 분석이 이뤄졌지만 유대 민족에 대해선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세계 각지를 떠돈 2000년 디아스포라 역사와 나치의 잔혹한 탄압이 맞물려 일종의 성역이 구축됐기 때문이다. 이 서사가 무너지면 유대 민족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유대 국가를 세운 명분이 무너질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이스라엘 사회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민족을 배척하고 ‘우리들만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유대 민족을 내세운 게 아니냐는 것. 저자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유대 국가로 여기는 한 이 나라는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스라엘에는 전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유대인을 비롯해 20%의 아랍인, 5%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유대 민족 개념을 해체하는 데 멈추지 않고 유대와 비(非)유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민족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지금의 세대가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새해 첫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경계 가자지구에서 폭격이 벌어졌다. 해묵은 민족, 종교 갈등을 넘어 새로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함께 만들자는 저자의 견해는 세대, 남녀, 빈부갈등 등으로 점철된 모든 나라에도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