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의 올 첫 장관 초청 간담 행사에 조성욱 공정위원장 지난 연말 SK실트론 사건 공정위 전원회의에 재벌 총수론 첫 출석 공정거래 정책 방향 놓고 재계간담회 소통 공정위 심판정의 재벌 회장과 경제단체 首長의 만남 눈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요 며칠 사이에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을 두 번이나 만났다. 한번은 지난해 연말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에서, 또 한 번은 연초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지난해 12월 15일엔 SK 회장으로서 공정위 사건 당사자인 피심의인 신분이었고, 신년엔 대한상의 회장이라는 경제단체장으로 조성옥 위원장과 마주한 것이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장과 최 회장 사이에 불과 한 달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잇따른 두 사건을 놓고 재계에선 화제가 됐다. 재벌 회장과 공정위 수장(首長)의 회동이 갖는 정치적 경제적 함의가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11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신년 공정거래 정책 놓고 대기업 사장단 간담회
이달 13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간담회는 조 위원장이 공정위의 올해 공정거래 정책 방향을 놓고 대한상의 회원사 대표들에게 설명하는 자리였다. 상의 회장을 맡고 있는 최 회장과 우태희 상의 부회장,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공영운 현대자동차 사장, 하범종 LG 사장, 조현일 한화 사장 등 대한상의 10개 주요 회원사에서 사장급 경영인들이 참석했다. 지난해 12월 30일부터 시행된 개정 공정거래법을 설명하는 행사였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40년 만에 전면 개편된 공정거래법을 놓고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대기업 사장단들과 소통하는 자리에 공정거래위원장이 직접 설명하러 온 것이다.
과거 같으면 재계를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이런 행사를 주관했을 테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전경련 패싱’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상의가 전경련 대체 기관으로 위상이 변화하는 모습이다. 이날 오전 10시30분부터 1시간 동안 열린 정책간담회에서 조 위원장은 올해 공정위 정책의 중점 방향을 설명했다. 경제검찰인 공정위를 재계가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최 회장의 당부도 이들의 대화에 녹아 있었다. 형식은 정책 간담회였지만 두 사람의 발언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뼈 있는’ 말들이 오갔다.
최태원 상의 회장이 13일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과 함께 상의 회의실로 향하고 있다. 지난해 최 회장이 공정위 심판정에 선 지 한 달 만에 두 사람이 만났다. 사진 대한상의
●뼈 있는 말 오간 간담회
조 위원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공정위는 시장을 하나의 정원으로 볼 때 시장경제를 잘 가꾸는 정원사”라고 비유했다. 그러면서 “새싹이 큰 나무가 되는 결실이 맺어진다면 이용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처럼 새 기업이 진입하고 혁신하며 독점적 지위를 가진 기업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하는 것이 공정위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조 위원장에게 공정거래 정책의 탄력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는 산업 환경에서 한국 기업만 공정거래 정책에 얽매여 경쟁에서 뒤쳐지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최 회장은 “세계적으로 산업과 시장 판도가 급격하게 재편되는 상황이며 우리가 ‘세계 시장의 공급자가 되느냐, 수요자가 되느냐’에 따라 국가 명운이 크게 엇갈릴 것”이라고 했다. 이어 새로 도입된 제도와 관련해 “기업들이 위법 리스크에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여 달라”고 촉구했다.
조 위원장은 개정 공정거래법을 설명하면서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와 부당한 영향력 행사에 대해 많은 걱정이 있다”며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만들고 부당 내부거래를 제지하는 것이 공정위의 기업집단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지난해 연말 공정위가 SK의 사업 기회를 최 회장에게 부당하게 제공한 것을 제재한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다.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달 15일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심판정에서 열린 SK실트론 사건 관련 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정부청사 문을 들어서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DB
●공정위 심판정에 선 그룹 회장
최 회장은 검사 역할을 하는 공정위 심사관과 자신의 변호인이 치열하게 법리 공방을 벌이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발언 기회를 얻어 직접 소명을 하기도 했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조 위원장이 주관했다. 법정으로 친다면 심판정 중앙에 자리 잡은 조 위원장이 부장판사 역할을, 공정위 심판관은 검사 역할을 맡고, 최 회장은 피의자 신분이 된 것이다. 공정위가 아침부터 밤까지 릴레이 심의를 이어간 것은 SK그룹 총수가 SK의 사업 기회를 사익(私益)으로 편취했다는 의혹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당사자의 해명도 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판정에서 조 위원장은 회의 진행을 위주로 하면서 최 회장에 대해 별다른 질의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사건은 재벌 총수가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의 사업 기회를 가지려고 개인적으로 투자한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관심이 높아 재계의 주목을 끌었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최 회장의 심판정 출석에도 관련 사건을 제재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SK와 최 회장에게 각각 과징금 8억 원씩 총 16억원을 매겼다. 다만 시민단체 등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검찰 고발은 하지 않기로 했다. 공정위로선 문재인 정부 출범 후 4년 동안이나 묵혀놓은 사건을 종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해 10월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에서 열린 ‘청년희망ON’ 행사에 참석한 모습. 김동주 기자
●SK실트론 주식 29.4% 최 회장 직접 취득이 논란
최 회장이 재계 총수로는 처음으로 공정위 심판정에 서게 된 사건은 무엇일까.
해당 사건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정위 조사에 따르면 SK는 반도체 소재산업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7년 1월 (주)LG가 갖고 있던 반도체 웨이퍼 생산회사인 LG실트론 주식 51%를 사들였다. 이후 SK는 주주총회 특별결의 요건을 갖추는 동시에 인정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유력한 2대 주주가 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추가 주식 매입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어 SK는 19.6% 지분을 갖고 있는 KTB로부터 주식을 취득했다. 나머지 지분인 29.4% 지분을 소유한 우리은행으로부터는 SK가 아닌 최 회장이 매각 입찰에 참여해 단독 적격 투자자로 선정돼 2017년 8월 총수익스와프(TRS) 방식으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공정위는 최 회장이 취득한 SK실트론 29.4%는 SK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이익이 될 수 있는 ‘사업 기회’였지만 이를 총수가 개인적으로 투자해 이익을 가로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근거로 공정위는 SK가 2016년 12월 LG실트론 경영권 인수 검토 때 LG실트론의 기업 가치가 1조1000억원에서 2020년엔 3조3000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 자료를 제시했다. 공정위는 최 회장이 취득한 LG실트론의 주식 가치가 2017년 대비 2020년 말 기준으로 하면 1967억원이나 증가한 것으로 계산했다. SK가 지분 인수를 포기하고 총수에게 밀어준 사업 기회로 최 회장이 2000억원 가까운 부당 이득을 챙겼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었다.
이달 13일 대한상의에서 열린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 초청 정책간담회에서 회원사 대표들이 조 위원장의 발표를 듣고 있다. 사진 대한상의
●“당혹스럽고 억울한 심정” 읍소
최 회장은 이런 공정위 판단에 억울하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공정위 심판정에서 한 최후 진술의 요지는 이렇다.
“내가 SK에 갖고 있는 주식이나 재산은 실트론에 갖고 있는 주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큰 액수다. 개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SK에 손해를 끼친다는 일은 저 개인으로도 할 수 없는 얘기다. 실트론 지분 인수가 SK그룹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름대로 개인적인 리스크가 있지만 감안하고 추진했는데 오히려 회사 이익을 가로채려는 행위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당혹스럽고 억울한 심정이다.”
이 사건은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가 2017년 11월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행위라며 공정위에 조사를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번 심리로 무려 4년 만에 공정위 결정이 이뤄졌다. 공정위 전원회의 결정은 1심 재판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시정 명령과 함께 과징금 16억원 부과에 불복하면 고등법원에 취소처분 소송을 내고 법정 다툼을 벌여야 한다. 사건을 신고한 경제개혁연대는 공정위가 검찰고발 조치를 하지 않고 유사 사업기회 제공 같은 것은 하지 말라는 부작위(不作爲) 시정 조치 명령만 내렸다고 반발했다. 최 회장 주변에선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법정 소송도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한다.
●경제단체장 메시지로 기업 환경 개선 노력
최 회장이 공정위 심판정에 직접 출석한 것은 재계에 던지는 함의가 적지 않다.
주변에선 출석을 말렸지만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두 차례나 수형 생활을 한 것은 최 회장에겐 아프고 힘든 기억들이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나절 꼬박 공정위 심판정에서 심의 현장을 지켜본 것은 사건 당사자이기도 하거니와 변호인에게 맡기는 것이 일견 무책임하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는 것이 최 회장 주변의 얘기다.
많은 대기업 오너 출신 최고경영자들이 국정감사 때 증인으로 출석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관 업무에 치중하는 것이 한국 기업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각에선 기업 총수가 공정위 심판정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로 공정위가 경제검찰로 위상을 세웠다는 얘기도 없지 않다. 대한상의를 이끄는 경제단체장으로서 자신을 심판정에 서게 만든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을 정책간담회 첫 연사로 초청한 것을 놓고 갖가지 해석을 낳는 이유다.
재계를 이끌고 있는 경제단체장으로서 더 이상 정부와 다툼을 벌이는 재판으로 가지 않고 당국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신호가 아닐까. 사익 논란에 휩싸인 과거를 해소하고 대한상의 최고 사령탑으로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비중을 두려는 것 같다는 말이 재계 안팎에서 들린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