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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밭을 정처없이 헤매는 연이… 내 모습이었다”

입력 | 2022-01-20 03:00:00

‘연이와 버들 도령’ 신작으로 돌아온 구름빵 백희나 작가
‘구름빵 사건’ 그후 웃는 표정이 사라져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간 연이처럼, 내 작가인생도 이젠 해피엔딩



닥종이 주인공들과 함께 19일 서울 용산구 작업실에서 신작 ‘연이와 버들 도령’에 나오는 닥종이 인형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선 그림책 작가 백희나. 그는 “신작은 상처받은 나를 치유한 축복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인형들은 왼쪽부터 연이, 버들 도령, 나이 든 여인.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2020년 12월 그림책 작가 백희나(51)는 폭설이 내리는 강원 정선군 가리왕산으로 들어갔다. 누더기처럼 해진 노란 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입은 닥종이 인형 연이를 손에 든 채였다. 그는 수북이 쌓인 눈밭 속에서 연이를 촬영할 장소를 찾기 위해 정처 없이 걸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눈길을 헤매는 내 모습이 연이와 다를 바 없다’고.

최근 그림책 ‘연이와 버들 도령’(책읽는곰)을 펴낸 그를 서울 용산구 작업실에서 만난 19일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그는 작업실 창문 밖으로 쌓여가는 눈을 가리키며 “연이 이야기를 하는 날 눈이 내린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그의 낯빛이 홀연 어두워졌다. “지금은 웃고 있지만 제게 표정이 사라졌던 시절이 있었어요. 힘든 시절엔 우울증에 걸려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고 풍 때문에 병원을 드나들었죠. 스트레스로 갑자기 구토가 밀려와 뛰쳐나갈 정도였고요.”

신작 ‘연이와 버들 도령’에서 주인공 연이가 설산을 헤매는 장면. 그림책 작가 백희나는 “엄동설한에 벌벌 떠는 연이의 모습을 찍기 위해 한겨울에 서울, 경기도, 강원도의 산들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책읽는곰 제공

이런 증세는 2020년 6월 일명 ‘구름빵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받은 직후 시작됐다. 2004년 발간한 베스트셀러 그림책 ‘구름빵’(한솔교육)은 큰 인기를 끌며 뮤지컬, 문구, 장난감 등 다양한 2차 저작물을 낳았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 손에 쥔 돈은 계약금을 포함해 20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출판계 관행에 따라 2차 저작물 권리를 출판사에 양도하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기 때문.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그는 “소송에서 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한 느낌이었다”며 “작가의 권리에 대한 나쁜 선례를 남긴 것 같아 후배 작가들에게 아직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에게 표정이 사라진 건 이때부터였다. 2020년 4월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추슬러지지 않았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감정을 꼭꼭 숨겼다. 신작에서 연이가 ‘나이 든 여인’으로부터 구박을 받으며 고통을 겪어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듯이. 다행히 옛이야기를 토대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오랜 소망을 신작으로 구현하면서 조금씩 예전의 삶을 회복할 수 있었다. 구름빵을 비롯해 ‘알사탕’, ‘장수탕 선녀님’, ‘이상한 손님’ 등 작은 종이인형들을 손으로 만든 후 자연이나 세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특유의 작업 방식은 신작에서도 여전히 빛난다.

작가는 옛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가족 제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민담에서 한집에 살면서 연이에게 궂은일을 시키는 계모를 ‘나이 든 여인’으로만 설정했다. 남녀에 대한 기존 성 역할에서 벗어나 연이와 버들도령의 얼굴을 비슷하게 그렸다. 그는 “버들 도령과 연이가 같은 자아를 지녔다고 봐도 되고 그렇지 않다고 봐도 좋다”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독자에게 열어두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연이가 결국 무릉도원에 머무는 버들 도령과 만나 행복을 추구하듯 그의 작가 인생에도 다시 봄날이 올까.

“작가 인생 초반부는 지독히 힘든 비극이었어요. 하지만 신작을 계기로 재기가 시작되는 것 같아요. 버들 도령과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연이처럼 이제는 힘들고 억울한 일은 다 잊고 행복하게 작업하고 싶어요. 연이의 인생도, 제 작가 인생도 해피엔딩을 꿈꿉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