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러 국경지역 르포] 취재기자 계속 쫓아오며 “떠나라”… 휴대전화로 찍은 현장사진도 삭제
러 침공 대비하는 우크라 예비군 우크라이나 예비군들이 22일(현지 시간) 수도 키예프에서 총을 들고 훈련을 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침공 위협이 고조되면서 우크라이나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까지 자발적으로 정기 군사 훈련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키예프=AP 뉴시스
곱토우카=김윤종 특파원
“여기서 당장 5분 내로 나가라. 불이행하면 체포할 수 있다!”
21일 오후 3시경(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북동부 곱토우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국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이곳에 국경검문소가 설치돼 있었다. 검문소에서 세관을 거쳐 약 950m만 걸어가면 바로 러시아 영토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검문소 인근에서 시민들을 취재하는 기자를 향해 다가오며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러시아와 군사 충돌 우려가 커져 현지 취재를 왔다’고 설명했지만 이 군인은 상관과 전화통화를 한 뒤 체포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자가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도 삭제하게 했다. 차를 타고 국경선 일대에서 조금 물러난 뒤 지나가는 시민들을 다시 취재하려 했지만 우크라이나 군부대 차량이 기자가 탄 차량을 끝까지 추적해 오면서 “빨리 떠나라”고 소리쳤다.
우크라이나 북동부 곱토우카 국경 검문소. 곱토우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하지만 이날 곱토우카에 도착하기 4, 5km 전부터 도로 1개 차선에 대형 화물 트럭의 정체 행렬이 보였다. 무려 2km 이상 늘어서 트럭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국경선 바로 앞 검문소에 도착한 뒤에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래 다툼에 국민만 힘들어”… 러 접경, 검문강화에 화물차 긴 행렬
사람-화물 자유롭게 오가던 국경, 양국관계 악화로 통과 절차 강화
검문소 앞 ‘만남의 광장’ 이젠 옛일… 우크라 러 수출 8년새 85% 감소
실업률 2018년 8.8%서 10.5%로… 주민들 “국민은 먹고사는 게 우선
나토 가입이 경제 도움 확신 줘야”
국경검문소 가는 길의 화물트럭 행렬. 곱토우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언제 검문을 통과할지 몰라서 일단 화물트럭들이 줄부터 서 있는 겁니다. 고래(러시아와 미국·서방) 다툼에 국민들만 힘들어요. 경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어요.”
21일(현지 시간) 검문소 앞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 A 씨는 익명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곱토우카에서 만난 현지 주민들은 이 일대 국경검문소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인적·물적 왕래의 주요 통로였다고 말했다. 특히 검문소 앞 카페는 양 국민이 만나 자유롭게 커피를 한 잔 하던 이른바 ‘만남의 광장’이었다고 밝혔다.
○ 강화된 검문에 화물트럭들 정체 극심
30대 여성 안나 씨는 “쉽게 국경을 오가며 러시아에 사는 언니와 국경 앞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여유를 즐겼다”며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관계가 나빠지면서 국경 일대 분위기가 이렇게 삭막해졌다”고 말했다.
유엔의 세관통계 데이터베이스(DB)인 ‘컴트레이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기업들의 러시아 수출 규모는 2012년 175억 달러(약 20조 원)에 달했다. 그러나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에 이어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면서 2014년 95억 달러, 2017년 39억 달러, 2020년 27억 달러로 크게 감소했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출 규모가 2012년 150억 달러에서 2017년 85억 달러, 2020년 63억 달러로 계속해서 줄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이주하는 인구도 2010년 약 200만 명에서 160만 명대로 감소했다.
○ 러시아 침공 우려에 경제도 휘청
통과 인원 급감한 국경 검문소 러시아 국경에서 불과 약 950m 떨어진 우크라이나 북동부 곱토우카 국경 검문소의 21일(현지 시간) 전경. 양국 교류가 활발할 때는 매일 수많은 인파와 물류 트럭이 오갔지만 군사 충돌 위기가 고조되면서 검문소 일대에서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곱토우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현지에서 만난 상당수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와 군사 충돌 위험, 미-유럽과 러시아 간 정치적 신경전이 고스란히 서민들의 팍팍한 삶으로 이어진다고 하소연했다. 자신을 사업가라고 밝힌 키릴 씨는 “나는 우크라이나어도 하고 러시아어도 한다. 원래 양국은 형제와 같은 사이이기도 하다”며 “서로 으르렁대지 말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반 국민들은 먹고사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고조되는 전쟁 위험에 불안한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은 ‘정부가 무작정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고집하기보다 유연하게 대처해 더 이상의 경기 침체를 막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베르니카 씨(19)는 “학교를 졸업해 취업을 해야 하는데 지금 (경제) 상황이 정말 어렵다”며 “나토에 가입하면 (우리가) 더 안전해질 수 있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정부가 현명하게 해결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군사 충돌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악화된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마저 겹치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극심한 일자리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2018년 8.8%였던 실업률은 2020년 9.5%, 지난해 최고 10.5%로 악화됐다.
경제 충격에 대한 우려는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다. 실제 군사 충돌로 이어질 경우 침공을 가하는 러시아는 물론이고 유럽 전체의 경제까지 크게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독일 언론 도이체벨레는 “군사 충돌이 현실화되면 러시아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수출통제·금융 제재가 거세지고, 러시아가 이에 맞서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해 에너지 대란이 발생하면 유럽 경제가 크게 손상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곱토우카=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