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 28일 미군 2사단 23연대 소속 1개 소대가 지평리 남동쪽에 위치한 쌍굴터널 근처를 정찰하기 위해 출발했다. 다음 날 2차 정찰에서 이 소대는 중공군의 습격을 받아 고지에 고립된다. 미군은 사투 끝에 간신히 이들을 구출하지만, 이 전투는 벌집을 쑤신 격이 됐다. 당시 미국 정부는 6·25전쟁 포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1월 13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으로 이 논의는 중지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 결과로 증명해야 했다.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동부전선의 중공군이 취약하다고 보고 북진을 명령했다.
아직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미 2사단은 엉거주춤 횡성 쪽으로 진격하다가 중공군과 조우한 것이다. 이 작은 전투는 다음 날 연대 규모의 전투로 발전한다. 마침 6·25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가 선봉에 서고, 23연대 3대대가 참가해 쌍굴 근처 고지를 점령하고 이틀간 중공군 대군과 격전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23연대는 지평리로 진입했고,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지평리 전투를 벌이게 된다.
지난 이틀간 쌍굴 지역과 지평리의 전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우연히 답사팀이 장군, 영관, 부사관, 사병에 종군기자 출신이라는 기막힌 구성이 되었다. 생존용사분 인터뷰도 하고, 지도와 전투기록을 들고, CSI(과학수사대)처럼 참호 흔적, 총탄 자국을 더듬으며 고지와 능선을 돌아다녔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