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권 장서가 윤길수 씨 “50년간 책 수집에 빠져들어 직장생활로 번 수입 절반 써… 원전 없으면 조사연구 힘들어져”
진달래꽃 초판
윤길수 씨
1994년 겨울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고서점 진호서적. 장서가 윤길수 씨(60)는 서점 주인이 건넨 김소월(1902∼1934)의 시집 ‘진달래꽃’(1925년) 초판본을 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 이것은 기존에 알려진 초판본들과는 달랐다. 표지에 꽃 그림이 없었고, 제목 중 ‘꽃’의 초성 글자가 달랐던 것. 장서가로서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중소기업 회사원인 그에게는 목돈이 부족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만기가 다 돼 가는 적금을 깨고 나서야 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최근 에세이 ‘운명, 책을 탐하다’(궁리)를 펴낸 그는 24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안목도 필요하지만 결심과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며 “진본이라고 판단되면 외상 거래 없이 값을 깎지 않고 샀다”고 말했다. 그가 소유한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1년 근대문학 작품 중 처음으로 등록문화재에 지정됐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진달래꽃’ 초판본은 총 4권에 불과한데, 같은 연도의 다른 초판본이 2015년 경매시장에서 1억3500만 원에 팔렸다.
그는 138m²짜리 아파트에 산다. 안방을 제외한 방 3개와 거실에까지 책이 가득 들어차 있다. 조선 후기 정치가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년)을 비롯해 소설가 이광수의 근대 최초 장편소설 ‘무정’(1918년), 독립투사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1926년),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1941년)은 모두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든 희귀 초판본이다. 반지하방에 전세로 살던 시절에도 책을 사려고 주택청약 통장까지 해지했다. 그는 “단순히 장서의 양만 늘린 게 아니라 질에 초점을 맞춰 체계적으로 책을 모았다”며 “내가 모은 책에 우리 근현대 문학사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문학과 책에 대한 열정만으로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책을 모았습니다. 수입의 절반 이상을 털어 50년간 2만 권을 샀어요. 돈을 벌려고 모은 게 아닙니다. 여태까지 제가 구입한 책 중 어느 것도 팔지 않았죠.”
현재 국내 근대문학 책들 가운데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 없다. 수백 년 묵은 고서뿐 아니라 근현대 책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우리나라가 발명했다는데 정작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년)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어요. 원전이 없으면 충분한 조사연구를 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