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립 식품의약품안전처장
고대 로마인들은 납의 유해성을 잘 모른 채 가공하기 쉽다는 이유로 많이 사용했다. 납 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납 그릇을 사용하며, 심지어 납을 먹기까지 했다. 납에 중독되면 신경계의 이상으로 통풍, 정신장애 등이 생길 수 있고 생식기능 이상으로 불임, 유산, 영아사망률이 높아진다. 로마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납중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현대사회에도 중금속, 환경호르몬 등 다양한 유해물질이 존재한다. 신기술과 신소재로부터 새로운 화학물질도 생긴다. 가소제나 보존료처럼 제품 제조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쓰이는 화학물질도 있다. 유해물질은 다양한 제품은 물론이고 공기나 물 등 자연환경 속에도 존재한다. 유해물질은 오염된 대기, 토양 등을 거쳐 생태계 먹이사슬을 지나 축적되면서 식품 등을 통해 우리 몸에 들어오기도 한다.
유해물질은 미량이라도 몸에 지속적으로 축적되면 암 같은 심각한 질병까지 일으킬 수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그동안 식품위생법, 화장품법 등에 따라 제품군별로 유해물질의 위해성을 평가해 왔다. 제품군마다 다른 법령으로 평가하다 보니 다양한 제품의 유해물질이 우리 몸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또 위해성을 평가한 제품군 위주로 안전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 이하로 유해물질이 검출되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왔다. 이로 인해 제품 안전 관리에 사각지대가 생기기도 했다.
통합 위해성 평가가 이뤄지면 우선 유해물질 함량이 높은 제품군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우리 몸에 들어와도 유해하지 않은 유해물질의 총량을 정해 섭취량과 사용량이 많은 제품군을 중심으로 총량이 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다. 위해성 평가가 끝나기 전이라도 예방적 조치가 필요한 경우 해당 제품의 생산 및 판매 등을 일시 금지할 수도 있다. 평가 대상도 기존의 식품, 화장품에서 의약품, 위생용품, 의료기기 등 식약처 소관의 전체 제품으로 확대된다. 여기에 국민 건강 보호라는 본질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위해성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 협력이 강화돼야 하는 이유다.
식약처는 국민 다소비 제품에 포함돼 위해성 평가가 시급한 유해물질 위주로 5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해 체계적인 평가를 실시하고 공개할 계획이다. 또 소비자단체나 5명 이상의 국민이 식약처에 평가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제 사람 중심의 위해성 평가로 전환하는 출발점에 섰다. 식약처는 통합 위해성 평가 제도가 안착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유해물질로부터 더욱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김강립 식품의약품안전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