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 긴장 고조를 두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공개 설전을 벌였다. 양국은 공식 회의 시작 전은 물론 회의 중에도 날선 발언을 주고받았고, 회의가 끝난 후에도 각자 언론을 통해 공방을 이어갔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31일(현지시간) ‘국제 평화·안보 위협’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안보리의 우크라이나 관련 공개 회의에서 “우리가 유럽에서 마주한 상황은 긴급하고 위험하다”라며 “러시아의 행동은 유엔 헌장의 핵심을 뒤흔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현재 상황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듯 평화와 안보에 대한 분명하고 중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오늘날 러시아의 침략은 우크라이나만 위협하는 게 아니다. 이는 또한 유럽을 위협한다”라며 “안보리가 그들의 공격적이고 불안정한 행동을 다루는 게 중요하다”라고 했다.
추가 병력 증강 경고도 나왔다. 토머스-그린필드 대사는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 병력을 3만 명 이상으로 확장하려 한다는 증거를 봤다”라고 했다. 또 “(러시아는) 공격의 구실을 날조하려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침략자로 묘사하려 한다”라고 했다.
토머스-그린필드 대사는 “만약 러시아가 향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안보리가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침공이 실현되면) 결과는 끔찍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아울러 “러시아는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다. 외교의 길”이라며 “우리는 외교의 길을 추구한다. 대립을 원치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문제가 진정 유럽에서 러시아의 안보 우려에 관한 일이라면, 협상 테이블에서 우려를 다룰 기회를 주겠다”라고 외교적 해결을 촉구했다.
반면 러시아는 긴장 고조의 원인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있다고 맞섰다. 바실리 네벤자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같은 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상황에 관해 논하기를 거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무엇을 논의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포문을 열었다.
우크라이나와의 불화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 때문이라는 주장도 내놨다. 네벤자 대사는 “긴장과 수사를 자극하는 건 (미국과 서방) 그 자신들”이라며 “전쟁 위협에 대한 논의 그 자체가 도발적”이라고 했다. 서방이 전쟁을 바란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오늘날 일어나는 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틀어지게 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라며 “우크라이나는 세뇌당하고 있다”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논의 역시 이간질과 세뇌의 일환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아울러 고(故)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의 이라크 전쟁 연설도 거론했다. 파월 전 장관은 지난 2003년 안보리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을 주장한 이른바 ‘유리병 연설’을 했고, 죽을 때까지 이를 자신의 최대 오점으로 여겼다.
네벤자 대사는 “파월 전 장관은 바로 이 방에서 이른바 ‘이라크의 WMD 존재 증거’라고 불리는 미상의 물질을 유리병에 담아 흔들었다”라며 “(하지만) 그들은 어떤 무기도 찾지 못했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날 서방이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쿠데타를 부추기고 “민족주의자, 급진주의자, 러시아 혐오자, 나치”에게 동력을 줬다고 거론하기도 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중국 역시 러시아의 편에 가세했다. 장쥔 유엔 주재 중국 대사는 공개 발언을 통해 “(미국의 주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국경 일대 병력 배치가 국제 평화와 안보에 위협을 가한다는 것”이라며 “이런 관점을 지지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장 대사는 “미국 주도 일부 국가는 우크라이나에서 곧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주장했다”라며 “러시아는 어떤 군사 행동도 개시할 계획이 없다고 반복했고,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필요 없다고 명확히 했다”라고 했다. 이어 “전쟁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라고 따졌다.
장 대사는 또 외교를 촉구하는 미국 및 유럽을 향해 “지금 시급한 건 ‘마이크 외교’가 아니라 조용한 외교”라고 일갈했다. 이와 함께 “나토는 냉전의 산물”이라며 “러시아의 타당한 안보 우려가 다뤄져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설전은 이날 회의 중에는 물론 회의에 앞서서도 치열하게 진행됐다. 러시아는 이날 회의 개최 여부를 두고 공개 투표를 요청했다. 요청에 따라 진행된 거수투표에서는 러시아와 중국만 반대에 손을 들었다.
네벤자 대사는 회의를 소집한 미국을 향해 “러시아 영토 내 러시아 병력 배치를 국제 평화·안보 위협으로 간주한다”라며 “이는 용납할 수 없는 내정 간섭이자 역내 상황에 대해 국제 사회를 오도하려는 의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토머스-그린필드 미국 대사는 “그들(러시아)은 (병력 배치 장소가) 자국 영토라고 하지만, 이는 이웃국의 국경과도 매우 가깝다”라며 “이미 이전에 한 번 침공당한 적이 있는 이웃국”이라고 꼬집었다.
신경전은 회의가 끝나고도 이어졌다.
토머스-그린필드 대사는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러시아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설명할 수 있도록 이 회의를 요청했다”라며 “(하지만) 우리는 많이 듣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듣기를 희망했던 답을 주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반면 네벤자 대사는 “왜 이 회의를 열었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하다”라며 “러시아가 이미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는 환상 때문인가”라고 비꼬았다. 또 “어떤 러시아 정치인, 공인도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계획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라고 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우크라이나 측의 도발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한편 이날 회의에는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도 참석했다. 세르지 키슬리츠야 유엔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는 공개 회의에서 “러시아 병력 약 11만2000명이 우크라이나 국경과 크림반도에 모였다”라며 “돈바스 주둔 러시아 병력의 중대한 전투 역량 강화도 우려되는 동향”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오늘 우리는 러시아 측으로부터 우리 국가를 향해 전쟁을 개시할 의도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라며 “경험에 비춰 우리는 러시아의 선언을 믿을 수 없고, 오직 국경 지대 병력 철수에 관한 실질적 움직임만을 믿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네벤자 러시아 대사는 키슬리츠야 우크라이나 대사가 발언하기 전 유엔 안보리 회의장을 떠났다.
이날 회의는 안보리 의장국 변경 하루 전에 열렸다. 오는 2월부터는 러시아가 한 달간 안보리 의장을 맡는다. 이에 일각에서 2월 한 달 안보리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소극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었다.
[워싱턴=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