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문장 하나 대궐에 올렸다가, 저녁에 아득히 먼 조주로 좌천되었지.
성군 위해 폐단을 없애려 했을 뿐, 노쇠한 이 몸이 여생을 아까워했으랴.
구름 걸린 진령, 고향은 보이지 않고 눈 덮인 남관, 말도 나아가질 못하네.
(一封朝奏九重天, 夕貶潮州路八千. 欲爲聖明除弊事, 肯將衰朽惜殘年. 雲橫秦嶺家何在, 雪擁藍關馬不前. 知汝遠來應有意, 好收吾骨장江邊.)―‘좌천길, 남관을 지나며 종손자 한상에게 준 시(좌천지남관시질손상·左遷至藍關示姪孫湘)’ 한유(韓愈·768∼824)
당 헌종(憲宗)이 부처 사리를 궁중으로 맞으려 하자 형부시랑(刑部侍郞)이던 시인은 이를 극력 반대하는 표문(表文)을 올린다. 불교 신봉이 국운과 제왕의 수명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역사적 사례까지 들어 반박했다. 유가의 맹주다운 용기였지만 황실의 뿌리 깊은 숭불(崇佛) 전통을 무시한 결과는 참담했다. 황제는 그날로 그를 ‘남쪽 오랑캐 땅’이라 천시되던 광둥 지역 조주자사(潮州刺史)로 내쳤다. 그나마 사형이 내려졌다가 좌천으로 감형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황명과 동시에 즉시 임지로 떠나야 했던 시인. 장안을 벗어나 남관에 이르렀을 때 산마루의 구름에 가려 더 이상 고향은 보이지 않고 눈 덮인 관문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때 손자뻘 친척 한상(韓湘)이 찾아온다. 험난한 여정을 동반하겠다는 뜻이었다. 한데 아열대의 풍토병을 익히 알고 있었던 시인은 ‘독기 감도는 강변’을 떠올렸고, 죽음을 앞두기라도 한 듯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당초 시인은 ‘부처가 영험이 있어 내 몸에 재앙을 내린다 해도 감수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직언했지만, 황제가 내린 ‘재앙’에 낙담하여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후일 그는 국자좨주(國子祭酒)로 복귀했고, 이로써 대유(大儒)의 목숨 건 직언은 역사의 미담으로 남아 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