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녹턴: 파란색과 은색―첼시’.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 소장
윤지원 큐레이터·첼리스트
명절을 맞은 기차역은 평소보다 북적이는 사람 소리와 기차 파열음으로 가득했다. 열차에 오르자 요란한 소리는 멀어지고,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기차 바퀴 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 리듬 속에서 곡 하나를 떠올렸다. 조지 거슈윈(1898∼1937)이 1924년경 작곡한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다.
“열차 바퀴의 강철 같은 리듬과 덜컹거리는 소리는 종종 작곡가들에겐 영감을 준다. 그 소리들에서 갑자기 음악이 들렸다. 전체적인 음악의 구성이 떠올랐고, 심지어 ‘랩소디 인 블루’가 처음부터 끝까지 적힌 악보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거슈윈)
거슈윈은 클래식 음악과 재즈를 접목해 독자적인 음악 양식을 만든 20세기 미국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1920년대 미국 음악계는 재즈 등을 바탕으로 다양한 음악 실험을 이어갔다.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재즈의 왕’이라 불리던 지휘자 폴 화이트먼은 거슈윈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이에 거슈윈은 클래식 음악에 재즈적 요소를 접목한 ‘랩소디 인 블루’를 작곡했다.
원래 녹턴은 밤의 음악을 뜻하는 음악 용어다. 휘슬러의 녹턴 연작 그림을 살펴보면, 차가운 도시를 표현한 듯한 냉소적이고 어두운 색상과 추상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유럽의 색채가 더해진 휘슬러의 작품에서, 아이라 거슈윈의 관심은 오히려 미국적 흥취를 발견하는 데 있지 않았을까. 그림을 보고 그는 환상적이고 자유로운 기악곡에 지역적 색채가 담긴 음악 형식 ‘랩소디’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는 동생의 음악에 딱 들어맞는 제목이었고 ‘랩소디 인 블루’는 오늘날 세계적인 음악이 되었다.
이처럼 음악과 미술은 서로를 다채롭게 한다. 조지 거슈윈은 음악 활동을 하면서 그림도 즐겨 그리며 수준급의 자화상을 남겼다. 화가 휘슬러는 미술의 음악적 표현에 몰두했다. 특히 휘슬러는 작품에 ‘녹턴’을 비롯해 ‘심포니’, ‘하모니’와 같은 음악 용어를 제목으로 붙였다. 평생 ‘음악 같은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휘슬러가 자신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제목의 곡, ‘랩소디 인 블루’를 들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이 아쉽다.
예술은 또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탑승권이다. 우리가 역에서 역으로 여행을 떠나듯 예술은 일상에서 상상의 세계로 떠날 수 있게 해준다. 기차 바퀴 소리로 시작된 나의 귀성길이 어느덧 ‘랩소디 인 블루’로 떠나는 여행이 되었듯이.
윤지원 큐레이터·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