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산과 물, 그리고 그 중심에 5대 궁궐이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 서울. 그 중심의 빛을 비추는 문, ‘광화문(光化門)’을 바라보면 난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1993년 나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의 한국관(韓國觀)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고, 그 과정에서 광화문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1922년 동아일보에 야나기가 기고한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기고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안에 건설하면서 광화문을 철거하려 한 데 반대의 목소리를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로 마치 사람들에게 호소하듯이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본인의 양심 고백이 내 가슴속의 확고한 희망으로 자리 잡았다.
대학원 재학 당시 나는 청와대 부근 팔판동에 살고 있었다. 이화여대 도서관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보내다가, 늦은 밤 경복궁 앞 정류장에서 내려 궁궐 담장을 따라 집으로 걸어갔다. 차 한 대 없는 텅 빈 길을 혼자 걷다 보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만 가지 생각 속에 잠겼고, 그 상념 속에 만 가지 풍경이 펼쳐졌다.
서울역사박물관의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 전시에서는 광화문 인근 조선시대 관청 거리의 모습이 문헌과 그림, 유물, 영상들을 통해 되살아났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광화문 공간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에서는 역동의 근현대사 사건들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나는 한국의 1970년대까지는 겪어 보지 못했지만, 1980년대 이후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며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이곳의 숨은 하이라이트는 8층에서 보는 광화문 일대의 풍경이다. 계속 이어지는 발굴 현장을 엿볼 수도 있으니 박물관을 가면 꼭 올라가 보기 바란다.
국립고궁박물관의 ‘고궁연화(古宮年華), 경복궁 발굴·복원 30주년 기념 특별전’은 경복궁 30년의 발굴 결과를 공개하는 자리다. 기존 전시와는 달리 영상과 기록 등으로 구성된 독특한 전시다. 특히 디자인 면에서 돋보였는데, ‘사람과 사람’ ‘시간의 연속’ ‘중첩’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전시 공간에 사계절을 역순으로 표현했다. 난 전시실 중간에 설치된 발굴에 직접 참여한 전문가들의 인터뷰 영상에 귀 기울이며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보고 듣는 동안 입체적으로 발굴 현장의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어 함께 현장을 답사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시장의 한쪽 면에는 톱과 망치 같은 도구들과 궁궐 건축에 사용된 도구들이 주인공이 돼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영상에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영상은 겨울에서 가을 그리고 봄으로, 눈송이도 빗방울도 꽃잎도 아래에서 위로 모두 거꾸로 올라간다. 시간은 희망이 그득했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향해 거꾸로 되돌아간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역시 꿈이 넘쳤던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다. 근정전이 나타나 빛이 돌더니 곧 우주로 변한다. 그리고 수많은 이름들이 별처럼 빛나며 쏟아진다. 발굴 작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이란다. 이름의 별똥비를 바라보는 순간 만나보지 못했지만 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묻혀진 기억의 땅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들에 경의를 표하고,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분들께 감사한다.
일제강점기에 사라질 뻔한 광화문은 1922년 경복궁의 동측에 이축됐다가, 6·25전쟁 때 소실된다.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됐고, 이후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되며 본래 위치를 찾아 2010년 8월 15일에 현재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