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2막]금융인 출신 ‘예술덕후’ 김영균 씨 허투루 보낸 95세 노인에 큰 자극… 은퇴후 서예-사진-그림에 매진 수채화 작품으로 늦깎이 수상까지… 돈 없어도 예술 즐기는데 문제없어 노년기엔 새 지식보다 경험 활용… 인정욕구 채워지면 자기만족 중요
자신의 수채화 작품 ‘페스의 테너리’ 앞에 선 김영균 씨. 모로코의 1000년 도시 페스에서 가본 전통적인 가죽 무두질 공장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2016년 한국수채화협회 우수상을 받았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자칭 ‘예술 덕후’ 김영균 씨(75)는 명함이 세 가지다. 직업란에 수채화가, 사진작가, 서예가라 붙은 명함들을 때와 장소에 맞춰 내놓는다. 금융감독원을 정년퇴직한 뒤 민간기업 감사 등을 거쳐 2008년 모든 직책을 내려놓을 당시, 그가 돌연 손에 잡은 것이 붓과 카메라였다. ‘남은 인생 30년은 예술을 따라가겠노라’며 ‘예술 덕후’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14년간, 수채화와 사진, 서예를 연마했고 지난달 초에는 자신의 공부 내용을 집대성한 책을 펴냈다. 제목은 ‘은퇴자의 예술 따라가기’(바른북스 ·사진). 글과 사진은 물론, 편집까지 손수 공을 들였다. 지난달 27일 그를 만났다.
○30+30+30의 인생,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30년
은퇴생활을 시작할 무렵, 오랜 의무와 책임에서 해방됐지만 마음은 뒤숭숭했다. 허탈감 상실감 무기력 등이 몰아쳐왔다. 그가 책머리에 쓴 글에 당시 상황이 요약돼 있다.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 지위가 어떻든 버틸 수 있는 재간이 있다. 자신의 지위에서 벌어진 이야기,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되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기껏해야 과거 얘기가 중심이 된다. 은퇴는 노인을 죽이는 최고의 암살자다.”
“이제 웬만하면 90세까지 사는 시대입니다. 30년을 배우고 익히며 살았고, 30년은 돈 벌고 가정 꾸렸지만, 앞의 두 30년보다 더 중요한 게 마지막 30년 아니겠습니까. 전 고민 끝에 예술을 선택했지요.”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김 씨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예술은 값비싼 취미라는 오해
2018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특선으로 뽑힌 작품 동행(同行). 금문(金文)체로 썼다.김영균 씨 제공
―늦깎이 예술가가 되는 데 성공하셨네요.
“은퇴하신 분뿐 아니라 현역이나 젊은 세대도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때 창작 활동을 시작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예술은 값비싼 취미가 아니에요. 거창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요. 누구나 배우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고 지식이 없어도 예술작품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잠재적 예술가예요. 무언가를 시작하면 무뎌진 자신의 감각을 추스르고 삶과 예술을 새롭게 즐길 수 있어요.”
“그림은 성남아트센터에서, 붓글씨는 도서관에서 시작했어요. 사진은 전문가에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주민센터건 평생교육원이건 아트센터건 배울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천에 옮기는 게 중요합니다.”
―예술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아내 말이 친구들에게 책을 주면 ‘너희 정말 잘사나 보네’란 반응이 돌아온대요. 집 한 채에 연금뿐인데 말이죠. 자랑질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봐요. 하지만 행복은 물질적 측면에서 찾다 보면 한이 없어요. 아무리 잘 먹는다 해도 하루 세 끼 이상 먹을 수 있나요. 행복을 느끼는 주체는 자신입니다. 스스로 행복을 어떻게 찾느냐가 중요하지요. 돈을 더 벌지 못하더라도 예술을 즐기고 따라가면서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것, 그게 더 행복한 것 아니냐. 이게 제 결론입니다. 제 아내도 같은 의견이고요.”
이런 그는 금융계에서 오래 일했지만 재테크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그는 예술을 하는 자세로 ‘여조삭비(如鳥數飛)’를 수시로 강조했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논어 학이(學而)에 나온다. 배우기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히는 자세를 말한다.
특히 노년에 새로운 시도를 할 때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권한다. “노년기의 기억체계는 밀려드는 새 지식을 쌓기보다 살아온 궤적과 경험치에 대한 가중치를 증가시키는 연륜이 늘죠. 예술 하기에 적당한 뇌입니다.”
이렇게 여조삭비의 매일을 보내며 정진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기쁨과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 아시죠.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드디어 큰 청새치를 낚은 기쁨. 그런 투쟁과 같은 기쁨을 매일 느낄 수 있어요.”
저서 ‘은퇴자의 예술 따라가기’는 한자의 기원과 서체부터 중국 문화예술 탐방기, 한국화와 서양화 감상, 미술사의 흐름, 사진과 회화 등 동서양과 과거 현대를 종횡무진 넘나든다. 무엇보다 그가 직접 다녀온 세계 각국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얻은 생생한 사진과 정보로 가득하다. 그는 기대는 안 하지만 혹시라도 책에서 인세가 들어오면 안나의 집에 갖다 주려 한다고 말한다. 김하종 신부가 운영하는 성남의 노숙인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과의 관계는 8년여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그는 매달 회비를 내고 가끔 노력봉사를 하러 간다.
○“남과 비교하지 말자”
일출을 찍은 사진작품을 성남 노숙인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에 기증했다. 김하종 신부(왼쪽)는 사진을 보고 “이 속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했다. 김영균 씨 제공
“인정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자기 만족이 더 중요해집니다. 큰 상을 받고 나니 욕심이 생기려 하더군요. 그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스스로 즐기려 하는 건데, 욕심 부리지 말자고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30년 금융맨이 30년 예술가로 살기에 도전하는 셈인데요, 앞으로 계획은….
“날갯짓을 계속할 뿐입니다. 가능한 제가 가진 것들을 나누면서 하고 싶어요. 지난해 용인시 도서관사업소에 ‘휴먼북(지식과 경험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으로 등록했는데, 코로나 상황이라 그 또한 여의치 않네요. 미국에 그랜마 모지스(1860∼1961)라는 할머니 화가가 있었습니다. 평생 농부의 아내로 살았는데 나이 70이 다 되어 건강상 움직이기 곤란해지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작품활동을 했어요. 산골 교회 마을 등 토속적인 풍경을 그렸는데 작품은 주로 연말연시 카드 그림에 실렸죠. 저도 그런 할머니처럼, 소박하게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며 스스로 행복을 찾을 뿐입니다.”
오래 살아본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60세에서 75세라고. 백수를 누리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서구나 일본의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김영균 씨의 이 시기는 예술로 더욱 빛이 났던 듯하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