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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회장이 창업동지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입력 | 2022-02-06 09:00:00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 샐러리맨에서 정상에 오른 사연
‘양치기 소년’ 꿈꾸는 박현주 미래에셋 창업주
‘호랑이는 앓는 듯이 걷고 있고 독수리는 조는 듯이 앉아 있다.’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이 2013년 2월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 시절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그는 당시가 가장 힘든 때였다고 회고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지난해 10월 하순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미래에셋에 2세 경영은 없다”고 선언했을 때 최현만 수석부회장은 사내 일로 주말도 반납한 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 회장이 후계 구도를 자신의 아들, 딸에게 넘기지 않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겠다고 공식화했을 때다. 당시 최 수석부회장은 자신의 뒤를 이을 전문경영인 풀을 만드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내가 없을 때 누가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 3배수 ‘인재 뱅크’를 만들어야 했다. 박 회장의 미션을 받은 최 수석부회장은 미래에셋의 후계 구도를 그리고 있던 터였다. 창업주인 박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선언한 만큼 최 수석부회장 또한 창업 세대의 일선 후퇴가 임박한 것으로 보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30대 중반에 미래에셋을 창업해 예순을 넘기기까지 하루도 쉼 없이 달려 왔다. 1997년 여의도 증권가에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때였다. IMF 외환 위기를 전후해 창업한 이후 20여 년의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은 샐러리맨 출신으로 전문경영인의 정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사진 미래에셋




●박현주의 ‘오른팔’ 최현만
최현만은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의 창업 동지다. 이른바 ‘박현주 사단’의 핵심이다. 1989년 하반기 동원증권(당시 한신증권)에 입사한 그는 늦깎이 샐러리맨이었다. 나이 서른에 증권사에 입사했으니 동기생들보다 4~5살이 많았다. 증권업계가 활황이던 1989년이었다. 당시 입사 경쟁은 치열했다. 종합주가지수가 1989년 4월 1일 1007.77이라는 역대 고점을 찍은 직후라 증권업계는 샐러리맨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방대인 전남대, 그것도 전공이 정치외교학이라 증권과는 거리가 먼 이력서였다. SKY 상경계 출신들이 경쟁적으로 증권사 입사 문을 두드린 때라 최현만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로 꼽혔다.


그런 최현만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1993년 4월 박현주 회장이 한신증권 중앙지점장이었을 때 최현만은 대리였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투자의 귀재,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던 박현주 지점장이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밤 12시가 되기까지 최현만 대리는 하루 종일 고객과 부대끼면서 살았다. 지방대 출신의 약점을 성실과 노력, 근면과 신뢰로 넘어서는 그가 박현주 지점장의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박 회장은 최현만을 창업 동지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로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박현주 사단의 핵심인 구재상 케이클라비스 회장. 2011년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 시절 집무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박현주의 ‘왼팔’ 구재상
1990년대 한국 자본시장에서 박현주는 ‘신화’와 같은 존재였다. 입사 3년 만에 과장, 5년 만에 지점장을 달아 전국 최연소 지점장 기록에 올랐다. 증권사 지점이 증권 거래 수수료로 먹고 살던 시절, 샐러리맨으로서 최고 정점이던 어느 날 갑자기 잘 나가던 회사에서 사표를 던졌다. 전국 약정(주식 거래실적) 1위인 그는 마흔이 되기 전에 자기 일을 해보고 싶었다며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다.



1996년 동원증권 강남본부장을 끝으로 박현주가 창업에 뛰어들었을 때, 그의 옆엔 최현만 서초지점장과 구재상 압구정지점장이 있었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아끼던 박현주가 사표를 내자 극구 만류했지만 지금 포기하면 영원히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박현주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한국 자본시장의 메기가 돼 보겠다는 박현주의 생각은 운용에선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관리에선 최현만 서초지점장이라는 에이스를 발탁했기 때문에 가능한 꿈이었다.


1997년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하기까지 ‘박현주 사단’으로 불리는 최현만과 구재상이라는 든든한 뒷짐이 있었다. 지금은 미래에셋에서 독립해 케이클라비스라는 이름으로 창업에 나섰지만 구재상은 미래에셋의 발판을 만들고 안정적인 운용으로 수익을 내게 한 탄탄한 기반을 닦았다. 박현주의 리더십에 구재상의 뛰어난 운용 능력, 최현만의 촘촘한 관리 능력이 오늘 날 미래에셋의 토양이었던 것이다.


최현만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이 2013년 8월 서울 중구 센터원빌딩에서 청년들과 함께 도시락토크를 즐기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미래에셋 센터원의 회장 집무실엔 누가?
미래에셋의 큰 그림을 설계하고 비전을 짜는 업무에 몰두하는 박현주 창업주는 사무실이 별도로 없다. 서울 중구 을지로 미래에셋 센터원 빌딩 회장 집무실은 몇 해 전부터 비워놓았다. 박 회장은 그 자리를 최 수석부회장이 쓸 것을 권유했지만 최 수석부회장은 한사코 마다했다. 그 후 2년 뒤에야 박 회장 집무실로 옮겼을 정도다. 최 회장의 집무실엔 ‘호랑이는 앓은 듯이 걷고 있고 독수리는 조는 듯이 앉아 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창업 당시 자본시장에서 항상 먹이를 찾고 기회를 보는 소수 게임 승부를 놓치지 않고 항상 깨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미래에셋벤처캐피탈 대표,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 E*미래에셋증권 대표, 미래에셋증권 사장,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 미래에셋증권 수석부회장, 그리고 미래에셋증권 회장에 이르기까지 최 회장의 이력은 미래에셋의 역사와 마찬가지다. 외환 위기로 한국 자본시장이 존폐 위기에 처할 1998년 무렵 최현만이 이끌던 서울 강남 압구정동의 미래에셋투자자문이 설립 4개월 만에 1000억원의 자문계약고를 올린 짜릿한 기분을 최 회장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IMF 외환 위기에서 주식과 채권 파생상품 등에 투자해 4개월 만에 85%라는 경이적인 수익을 내자 너도 나도 그에게 돈을 맡기려고 문을 두드렸다. 박현주의 뛰어난 리더십 뒤에는 최현만의 그림자 같은 관리와 언제나 2인자인 ‘서번트 리더십’이 있었다.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이 지난해 9월 소비자 보호를 위한 고객동맹 실천 선언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사진 미래에셋




●박 회장이 최현만을 후계로 선택한 이유
지난해 10월 하순 최 수석부회장은 박 회장의 전격적인 전문경영인 체제 선언을 ‘세대교체’ 신호로 받아들였다. 30대 창업 세대들이 예순을 넘기는 만큼 미래에셋이 활력을 잃지 않으려면 과감한 세대교체만이 해답이라고 본 것이다. 창업주의 의중을 간파한 그는 자신을 이어갈 젊은 인재들을 어떻게 발탁하고 물러날지를 고민했다. 박 회장은 임원들에게 정년제를 도입하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조직에 ‘젊은 피’를 수혈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런데 박 회장은 전문경영인 1호로 최현만을 마지막 순간 발탁했다. 아니 겉으로는 그랬을지 몰라도 박 회장 머릿속엔 일찌감치 그를 낙점해뒀을지도 모른다.


창업주인 박 회장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때라고 생각한다. 미래에셋의 굵직한 거래 때 박 회장이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일 외에는 대부분을 CEO들에게 일임하고 있다. 그만큼 시스템으로 움직이도록 조직을 만들어놓았다. 박 회장은 “이제 깊은 산골에 들어가 양을 기르며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싶다”고 주변에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한다. 그의 꿈이 얼마나 빨리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문경영인에게 그룹을 맡기겠다는 생각은 확고한 듯했다. 박 회장은 왜 창업 동지나 마찬가지인 최현만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을까.



박현주 미래에셋 창업주는 과감한 세대교체를 통한 미래에셋의 DNA 혁신을 위해 일선에서 물러날 계획이다. 박해윤 기자 land6@donga.com

“자식들에게 회사 경영을 맡기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한 일이라고 무조건 받아서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미래에셋은 전문경영인들이 이끌어 가게 될 것입니다. 자식에게 주식은 물려주겠지만 지분만큼 이사회에 참석해 의견을 내는 방식으로 회사 경영에 충분히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겠지요. 샐러리맨이 사장이 되는 문이 활짝 열려야 천하의 인재가 모여들 것입니다. 그래야 미래에셋이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할 것입니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기로 결심한 박 회장의 속내다.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이 2013년 8월 청년들과 만나 도시락을 먹으면서 대화하는 모습.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최현만의 미래에셋, 혁신 DNA 산실되나

올해 창립 25년을 맞는 미래에셋은 이제 최현만 회장의 새 리더십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동안 박현주라는 큰 그림자에 가려 있던 최현만 체제가 미래에셋 4반세기의 문을 열고 새로운 리더십을 맞게 되는 것이다.

최 회장은 기자에게 “열심히 일하면 월급쟁이도 회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창업주인 박 회장이 저를 통해 메시지를 낸 것으로 생각한다”며 “외환위기 때 압구정동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출발한 미래에셋이 한국 자본시장의 최강자로 올라선 것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하게 혁신의 길을 개척해왔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연말 ‘2만 번의 통찰-상위 1퍼센트 부자들이 부를 얻는 비밀’(한국경제신문)이라는 책을 펴냈다. 대우경제연구소 출신인 한상춘 박사와 공동으로 최상위 부의 미래를 예측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돈의 흐름을 살펴봤다”며 지인들에게 회장 취임 기념 선물로 나눠주고 있다.


박 회장과 최 회장은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 정도다. 박 회장이 그를 ’신뢰의 경영인‘으로 꼽은 이유는 단지 오랫동안 미래에셋에 몸담아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렵다. 그는 앞에 나서지 않고 언제나 박 회장의 뒤에서 조용히 일하고 있었다. 이제 혁신의 미래에셋 DNA를 최 회장이 뿌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그가 세대교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할지, 아니면 새로운 리더십을 선보일지 여의도 증권가, 나아가 글로벌 시장이 주목하고 있다.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이 지난해 연말에 펴낸 책. 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과 공동으로 상위 1% 부자들이 부를 얻는 비밀을 풀었다고 한다. 사진 한국경제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