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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이정은]‘스포츠 워싱’

입력 | 2022-02-07 03:00:00


“아, 상당히 도발적이네요!” 4일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을 중계하던 미국 NBC 방송 앵커가 다소 놀란 듯한 어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성화봉을 치켜든 최종 성화 봉송 주자 2명이 성화대를 향해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이 중 한 명이 신장위구르 출신 선수라는 내용이 소개되자 진행자들이 움찔한 것이다. ‘중국이 도발적 선택으로 서방의 올림픽 보이콧을 되받아쳤다’는 내용의 외신 분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중국 서북쪽의 신장위구르는 중국 당국의 인권 유린이 행해지는 핵심 지역으로 지목받아온 곳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대학살(genocide)’이 자행되는 곳이라고 맹렬히 비판해온 곳이자 ‘외교적 보이콧’에 줄줄이 나선 주된 이유다. 그 지역 출신 선수를 중국이 보란 듯이 점화식 주자로 내세우자 ‘스포츠 워싱(sports washing)’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분석이 나왔다. 스포츠 정신과 게임 열기를 앞세워 인권 유린 같은 부정적 평판을 세탁하려 한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이미지 포장을 위해 국제 스포츠 행사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늘 있어 왔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을 놓고 국제 인권단체들은 ‘피로 얼룩진 월드컵’이라는 혹평을 서슴지 않는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강제 합병과 반체제 인사 탄압 등을 월드컵의 열기로 감추려 했다며 ‘스포츠 워싱’의 대표 사례로 거론한다. 올해 11월 열리는 카타르 월드컵도 비슷하다. 카타르는 현대판 노예제로 불리는 가혹한 고용계약 시스템 ‘카팔라(kafala)’ 등 인권 문제로 비판받아 온 국가다. 영국 가디언은 “2022년은 베이징에서 시작해 카타르로 끝나는 ‘스포츠 워싱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논평까지 내놨다.

▷거액이 투입되는 국제적 스포츠 구단 인수나 후원에도 관련 논란이 따라붙는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3억 파운드(약 4800억 원)를 들여 영국의 프로축구 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한 것은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 사건으로 국제적 비판에 시달린 이후였다. 러시아 부호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003년 첼시FC를 인수하자 “러시아 정부가 배후에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다.

▷선수들의 피땀과 스포츠 정신은 전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힘이다. 파킨슨병을 앓던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올림픽 성화를 들어올렸을 때의 감동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이런 스포츠 파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결국 얄팍한 눈속임이라는 것을 팬들은 모르지 않는다. 위구르인 성화 주자의 미소만으로 위구르 인권 문제를 가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