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 워크룸프레스 대표·그래픽 디자이너
“우리는 종이 없는 사무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알레산드로 루도비코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 중
책과 암은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곧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은 지 수십 년도 넘은 것 같은데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2012년 12월 24일 미국 시사 잡지 뉴스위크가 트위터 계정에 한 장의 사진을 게시했을 땐 이번엔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분위기가 꽤나 비장하고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트위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LAST PRINT ISSUE(마지막 인쇄판).” 하지만 종이 인쇄는 잠시 중단됐다가 이어졌고,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전달하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 대중화될 때마다 사람들이 맨 먼저 이렇게 외쳤다. “이제 곧 종이와 책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종이의 힘’은 여전하다. 지금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한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으로 콘텐츠 전달 방식은 확장되고 있다. 이런 신기술 도입 소식이 들릴 때면 가끔은 종이 책을 디자인하는 내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암세포처럼 종이의 생명력도 끈질길 것이다. ‘종이의 사망’에 대해 섣부르게 조의금을 준비할 때도 아니다.
김형진 워크룸프레스 대표·그래픽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