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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생명력[내가 만난 名문장/김형진]

입력 | 2022-02-07 03:00:00

김형진 워크룸프레스 대표·그래픽 디자이너


“우리는 종이 없는 사무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알레산드로 루도비코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 중



책과 암은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곧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은 지 수십 년도 넘은 것 같은데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2012년 12월 24일 미국 시사 잡지 뉴스위크가 트위터 계정에 한 장의 사진을 게시했을 땐 이번엔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분위기가 꽤나 비장하고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트위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LAST PRINT ISSUE(마지막 인쇄판).” 하지만 종이 인쇄는 잠시 중단됐다가 이어졌고, 1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이나 종이가 일련의 전자 기기로 대체된다는 전망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과학자와 미래학자들은 도서관이 음성 저장소가 되리라는 전망, 책이 광학 기기로 대체되리란 전망을 반복했다. 물론 그 일부는 실현되기도 했다. 전신, 마이크로필름, 라디오, TV, 그리고 인터넷 등이 그것이다.

정보를 전달하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해 대중화될 때마다 사람들이 맨 먼저 이렇게 외쳤다. “이제 곧 종이와 책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종이의 힘’은 여전하다. 지금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한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으로 콘텐츠 전달 방식은 확장되고 있다. 이런 신기술 도입 소식이 들릴 때면 가끔은 종이 책을 디자인하는 내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암세포처럼 종이의 생명력도 끈질길 것이다. ‘종이의 사망’에 대해 섣부르게 조의금을 준비할 때도 아니다.


김형진 워크룸프레스 대표·그래픽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