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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품을 보는 ‘새로운 눈’ 갖기[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2-02-07 03:00:00

〈45〉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함께한다는 것




하루 중 언제 박물관에 가는 것이 가장 좋을까. 언제 가야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호젓하게 관람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시간인 주말 오후는 피하는 것이 좋다. 박물관이 문을 여는 이른 오전에 가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예상외로, 아침에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내 경험 속에서는 박물관이 가장 호젓한 때는 폐장하기 30분에서 1시간 전쯤이다. 그때 가면 관객이 적을 뿐 아니라, 문 닫기 전 특유의 쓸쓸함 때문일까, 공간이 한결 귀하게 느껴진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삶의 시간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그런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라면, 전시물을 한층 더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다. 그런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라면, 전시물뿐 아니라 전시물을 보러 온 사람들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엇을 보러 왔다는 목적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을 보고 있다는 과정 자체를 누리기 시작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된 삼국시대의 두 반가사유상을 한 관람객이 감상하고 있다. 왼쪽은 6세기 후반, 오른쪽은 7세기 전반에 제작됐다. 김영민 교수 제공

얼마 전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삼국시대에 제작된 두 점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보기 위해 ‘사유의 방’에 들어간 나는 반가사유상만큼이나 그걸 보고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아니 왜 저들은 인파가 사라진 이 시간에 일부러 반가사유상을 보러 혼자 온 것일까. 반가사유상을 혼자 보러 왔다고 해서 그가 특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근무 시간에 진상 고객에게 시달리고, 동료와 사소한 말다툼을 일삼고, 상사를 뒤에서 흉보았을 범용한 사람 중의 한 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이 추운 겨울밤 어둠을 뚫고 와서 반가사유상 앞에 홀로 서 있다. 나는 신성이 깃든 반가사유상보다는 그 앞에 서 있고자 한 관객에게 연대감을 느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 정명희는 큐레이터의 삶을 소개한 책 ‘한번쯤, 큐레이터’에서 무엇인가 같이 볼 때 익명의 사람조차도 잠시나마 “우리”가 된다고, 같은 공간이라고 할지라도 누구와 함께했느냐에 따라 확연히 다르게 기억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대학 시절 구석진 극장에서 상영되는 독립 영화를 즐겨 보러 가곤 했었다. 가뜩이나 관객이 별로 찾지 않는 독립 영화 조조 상영에 가면, 정말 몇 안 되는 관객들과 적막하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소수에게만 어필하는 독립 영화를 그보다 더 소수의 인원과 함께 보다 보면, 서로에게 말을 하지는 않아도 관객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연대감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저 초면이지만 근처에서 차 한 잔 함께하지 않으실래요? 방금 본 영화, 아니 반가사유상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귀한 것을 함께 보았다는 이유로 잠시 “우리”가 된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험난한 세파 속에서 뭔가 한배를 탄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혼자 조용히 감상하기 위해 온 사람의 평화를 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언제나 그렇듯이 낯선 사람에게 느닷없이 말을 걸 용기 같은 것은 없다. 그 대신 반가사유상 전시와 아울러 진행되고 있는 ‘조선의 승려 장인’ 전시를 보는 것이 좋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음 달 6일까지 조선 불교미술 제작자 등의 삶과 예술세계를 살피는 ‘조선의 승려 장인’전을 연다. 우키타 잇케이(1795∼1859)가 그린 ‘조선표객도’. 일본 화가가 본 조선 승려 장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아마도 올해의 가장 훌륭한 전시 중 하나가 될 ‘조선의 승려 장인’전은 널리 알려진 국보나 보물 같은 명품을 모아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는 전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낯선 대상인 승려 장인에 대한 꼼꼼한 연구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학술적” 전시다. 단지 학자를 위한 전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연구 결과를 보다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탄생한 “대중적” 전시다. ‘조선의 승려 장인’전에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황홀한 불교 예술품뿐 아니라 그러한 예술품이 탄생하기까지 과정을 증거하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넘친다.

어떤 전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수년 전, 플랑드르 회화의 대가 얀 반 에이크의 제단화를 보기 위해 벨기에의 성 바프 대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때 그 제단화는 복원 및 보수 과정 중이어서 그 전모를 볼 수는 없었다.

1625년 을축년 출생의 7명이 모임을 가진 것을 기념해 승려 장인 의인이 그린 ‘을축갑회도’. 승려 장인이 불화 이외의 그림도 그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러나 다행히도 바로 그 복원 및 보수 과정을 관람객들에게 공개함을 통해 관람객들은 성 바프 대성당의 제단화와 같은 걸작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상상 속에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조선의 승려 장인’전 역시 찬란한 불교 예술품뿐 아니라, 조선 시대 승려 장인들이 그 빛나는 불화와 불상을 만들어 나간 과정을 추체험하게 해 준다.

결과에만 집중한 나머지 과정을 체험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과연 그 결과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을까. 소시지 만드는 과정을 본 사람들은 소시지를 먹을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차마 보지 못할 과정을 거쳐 만든 결과물은 과연 온전한 것일까. 도축 과정을 본 사람들은 고기를 먹기 힘들다는 말이 있지만, 도축 과정이 지나치게 잔인한 고기는 과연 윤리적인 것일까. 승려 장인들이 성물(聖物) 제작 과정 자체를 어떻게 심미화하고 성화(聖化)했는지를 안다면, 그 예술품에 대한 우리의 감상과 이해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지 않을까.

불상을 그리거나 만드는 긴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이른바 점안(點眼)이다. 즉 불상에 눈동자를 박거나 찍는 일이다. 그 눈동자로 인해 불상은 온전한 성물로 도약한다. 결과로서의 예술품을 보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 예술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두루 살필 수 있을 때 예술품의 향유는 한 차원 더 도약할 것이다. 작품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긴다는 점에서, 그것은 감상 과정의 “점안”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