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티븐 브라이어 미국 연방 대법관이 은퇴 의사를 밝히는 자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모처럼 활짝 웃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브라이어 대법관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서서 “댕큐 댕큐”를 연발하며 그의 업적을 칭송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브라이어 대법관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손자와 함께 백악관에 놀러오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백악관에서 열린 스티븐 브라이어 연방 대법관(왼쪽) 은퇴 발표식. 1994년 브라이어 대법관 인준청문회 때 이를 주재하는 상원 법사위원장을 맡은 인연이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오른쪽)은 “당시 그의 발언 중 ‘법은 힘없는 이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소개했다. 백악관 홈페이지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됐지만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의 속은 타들어갑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올 11월 중간선거, 나아가 2024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의 쓴맛을 볼 것이라는 기사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브라이어 대법관이 ‘반강제적으로’ 은퇴를 선택한 것도 이런 위기감을 반영합니다.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4명이 선출 대상인 이번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상하원의 다수당 지위를 모두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처럼 물가가 안정된 나라에서 수십 년 만에 나타난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 번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중점법안들,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감으로 이어지는 외교 불안 등 바이든 행정부에 악재는 갈수록 늘어갑니다.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석 지위를 잃을 경우 브라이어 대법관의 후임으로 진보 인사가 자리를 잇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공화당이 상원을 지배하게 되면 진보 대법관 지명을 막기 위한 로비를 하거나 과반수가 필요한 인준 표결 때 반대표를 행사하는 방식으로 ‘방해 공작’을 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화당이 아닌 브라이어 대법관을 지지해온 민주당 쪽에서 그에게 은퇴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정치 판도가 바뀔지 모르는 중간선거 전에 빨리 젊은 진보 대법관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계산 때문입니다.
브라이어 대법관의 은퇴 결정은 바이든 행정부에게 위기감 해소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소식임에 분명합니다. 종신직인 연방 대법관이 은퇴를 선언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 후임자 지명권자인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 체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현재 미 연방대법원의 9명의 대법관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브렛 캐버노, 엘레나 케이건, 닐 고서치, 에이미 코니 배럿, 소니아 소토마요르, 존 로버츠(대법원장), 스티븐 브라이어,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얼 앨리토. 브라이어, 소토마요르, 케이건 등 3명은 진보, 나머지 6명은 보수 성향으로 분류된다. 연방대법원 홈페이지
바이든 대통령은 “2월 중 흑인 여성 가운데 후임자를 지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후임 물색 작업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맡겼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검찰총장, 상원 법사위원회 소속 의원 등 법조 분야에서 쟁쟁한 이력서를 가진 해리스 부통령이 적임자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커탄지 브라운 잭슨 연방항소법원 판사, 레온드라 크루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 대법관 등이 물망에 오르는데 최근 한 명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바로 해리스 부통령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후임자 물색 작업을 지휘하라고 맡긴 해리스 부통령을 민주당 일각에서 아예 후임 대법관으로 미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해리스를 대법원으로(Harris to Supreme Court)’ 움직임은 일선 의원들 사이에서 단순한 희망 사항으로 거론되던 것에서 점차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폭스뉴스 등 보수 성향 매체들이 해리스 대법관 가능성을 띄우기 시작했지만, 민주당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동조하는 20~30명의 의원들은 브라이어 대법관 은퇴 발표가 나오자마자 소셜미디어에 “해리스 대법관은 어떨까” 등의 메시지를 공유하며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최초의 여성·흑인·아시아계 부통령이라는 역사를 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왼쪽)은 기대만큼의 업무수행력을 보이지 못하고 조직 리더십에도 의문이 제기되면서 바이든 대통령(오른쪽)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은퇴하는 브라이어 대법관 후임으로 해리스 부통령을 밀자는 의견이 급부상하고 있다. 백악관 홈페이지
해리스 대법관 행(行) 지지자들은 일거양득론을 펼칩니다. 부통령이 된 뒤 뚜렷한 업적이 없는 해리스 부통령이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은 법률가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해리스 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 검찰총장을 지낼 때 강력 범죄 소탕, 소수 인종 차별 금지 등에서 업적을 쌓으며 상원의원으로 가는 발판을 삼았습니다. 상원의원이 된 뒤에는 법사위 핵심 멤버로 활약하며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2018년 성추문 의혹에 휩싸인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인준 청문회 때 그녀가 던진 날카로운 질문들은 지금도 ‘레전드’로 회자(膾炙)됩니다.
부통령의 빈 자리에 좀 더 나은 인물을 데려와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일거양득 셈법은 완성됩니다. 고령의 바이든 대통령이 불시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가능성에 대비해 국정 수행 능력을 갖춘 부통령이 승계 작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지적은 당 내외에서 꾸준히 제기돼왔습니다. 지난달 여론조사기관 레거의 조사에 따르면 해리스 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에 대한 긍정 평가는 42%인 반면 부정 평가는 56%로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와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수준입니다.
민주당 지도부는 아무리 인기 없는 부통령이지만 부담스러운 짐을 덜어버리는 식으로 대법관으로 보낼 경우 상당한 후폭풍이 예상된다는 점에서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을 삼가는 분위기입니다. 학계에서도 “부통령 교체에 따른 법적 절차를 연구해야 한다”면서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CNN은 “가능성과 정당성이 크지 않다”면서 “이번 기회에 부통령의 역할과 능력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보도했습니다.
브라이어 대법관 후임자를 논의하는 백악관 회의. 바이든 대통령, 해리스 부통령, 딕 더빈 상원 법사위원장, 척 그래슬리 상원 법사위 공화당 간사 등이 모였다. NY1
백악관은 인사 실패를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현 부통령은 2024년 대선 때 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백악관은 후임 대법관을 논의하는 회의 개최 사실을 알리며 회의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해리스 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상석에 앉아 회의를 하는 장면입니다. 해리스 대법관 불가 방침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하지만 언론 브리핑에서 거론될 정도면 정치권에서 상당한 논의가 진전됐고, 대통령도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의 약점을 보완하되 대통령을 가려서는 안 된다.”
부통령의 역할에 대한 유명한 격언입니다. CNN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평가하는 유능한 부통령으로는 딕 체니(2001~2009), 앨 고어(1993~2001), 조지 HW 부시(1981~1989), 린든 존슨(1961~1963) 등이 꼽힙니다. 정치 경력은 부족하지만 국민적 인기가 높은 ‘워싱턴 아웃사이더’ 대통령과 ‘인사이더’로서 협상 경험이 풍부한 부통령 체제가 좋은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베스트’까지는 아니어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합(合)이 좋았던 부통령(2009~2017)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탄탄한 부통령 경력을 가진 바이든 대통령 자신이 부통령 거취 문제로 분란을 경험하게 될 줄은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