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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 “차 빼라” vs 매매상 “갈 곳 없다”…‘불법공생’ 틀어진 이유는?

입력 | 2022-02-09 14:59:00

LH사태 이후 개정된 농지법 때문에 발등 불 떨어진 서울 강남구 율현동 강남중고차연합센터. 20년 가까이 주차장으로 써온 주변 농지를 원상복구해야 하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거기 자갈밭이 원래는 다 농지입니다. 지금은 주차장처럼 쓰이고 있지만요.”

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율현동 강남중고차연합센터에 입주한 한 중고차 매매상 A 씨는 본보와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기자가 A 씨가 말한 장소를 둘러보니 입구에는 ‘율현 주말농장’이라고 적힌 허름한 표지판이 붙어 있었지만 농장 안쪽은 영락없는 대규모 주차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토지 등기에는 논이나 밭으로 등록돼 있지만 땅에는 동전만한 자갈만 가득했다. 1차선 도로 폭만큼 차량이 지나다닐만한 길이 나 있고 양 옆으로 다양한 종류의 차량 200여 대가 빼곡히 주차돼 있었다. 학원 차량으로 사용됐던 노란색 승합차나 1t 트럭 여러 대가 줄지어 주차돼 있기도 했다. 기자가 현장을 둘러보는 중에도 수시로 차량이 드나들었다.


●강남구청 “25일까지 철수” 명령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곳에 있는 차량들은 길 건너 맞은편 강남중고차연합센터에 입주한 매매상들이 팔려고 갖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용도는 논이나 밭, 임야로 구분돼 주차장으로 쓰일 수 없지만 2007년경부터 버젓이 주차장처럼 운영돼 왔다. 지도 애플리케이션 로드뷰로 과거의 모습을 보니 2010년에도 빈 공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 강남구가 과거 몇 차례 이곳에 대해 불법주차 단속에 나섰지만 그때뿐이었다. A 씨는 “매매상들이 차량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묘목 몇 그루를 심어놓고 농지라고 우기는 식으로 20년 가까이 단속을 피해왔다”고 말했다.

25일까지 이곳에 있는 차량 200여 대는 모두 다른 곳으로 철수해야 한다. 강남구는 지난해 12월 이곳 지주와 중고차 매매상들에게 “2022년 2월 25일까지 차량을 모두 빼고 땅을 농지로 원상회복 시키지 않으면 공시지가 또는 감정평가액의 25%의 달하는 이행강제금을 물리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지난해 3월 감사원이 중고차연합센터의 농지 전용 문제를 강남구청 지역경제과에 지적하자 부랴부랴 계도에 나선 것이다.

구는 지난해 8월 시행된 농지법 개정안을 적용해 많게는 수억 원에 달하는 이행강제금을을 부과하겠다는 방침이다. 기존 농지법에 따르면 토지 원상회복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구청이 할 수 있는 것은 고발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불거진 ‘LH사태’를 계기로 농지법 개정안이 시행되며 구가 이행강제금을 물릴 수 있게 됐다.


●지주들은 “차 빼라”, 매매상은 “갈 곳 없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로 인해 최근 지주와 매매상의 관계가 급격히 틀어졌다. 이 곳 지주들과 매매상들은 수년 동안 ‘불법 공생관계’를 이어왔다. 지주들은 직접 농사짓기 애매한 땅을 빌려줘 돈을 받을 수 있었고, 매매상들은 부족한 주차공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지주 이모 씨는 “차를 대는 건 알았지만 별로 복잡할 게 없다고 생각해서 계약 관계를 이어왔다”며 “이번엔 영락없이 이행강제금을 물을 처지라 매매상들에게 차를 빼달라고 사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매상들은 ‘배짱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매매상 박모 씨는 “지주들이 임대료 명목으로 한 대당 5만원 씩 받아 놓고 지금 와서 갑자기 나가라고 한다”며 “이 많은 차를 당장 어디로 보내겠나”라고 말했다. 일부 매매상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논과 밭은 단속에 나선 지역경제과 소관이지만 임야는 공원녹지과 소관이라는 점을 악용해 바로 옆 임야로 차량을 옮겨놓는 방식이다. 지역경제과 관계자는 “임야로 옮겨놓은 차량에 대해서는 단속 권한이 없다”고 했다. 공원녹지과 관계자는 “담당 부서 간 협의한 내용이 없어 답할 것이 없다”고 했다.


●율현동 도로와 성남·위례까지 ‘풍선효과’
농지에 불법주차됐던 차량들이 인근 세곡동 주택단지나 가까운 위례, 성남 등으로 옮겨지는 ‘풍선효과’도 우려된다. 실제로 구청이 제시한 원상회복 기간인 25일이 다가오자 일부 매매상들은 차량을 농지 밖으로 옮겨 불법주차를 이어가고 있었다.

9일 오후 기자가 중고차연합센터 인근 율현공원 삼거리를 둘러보니 판매용 중고차로 보이는 화물차 3대와 승용차 1대가 도로 1차선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갓길에도 승용차 서너 대가 버젓이 도로에 세워져 있었다. A 씨는 “이 차량들은 모두 매매상들이 소유한 중고차”라고 설명했다. 중고차매매단지 내 유료 주차장에 판매용 차량을 대 놓고 있다는 매매상 B 씨는 “일부 매매상들은 인근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주택가와 위례 이면도로 등까지 중고차를 옮겨 공간만 있으면 마구잡이로 차를 대 놓고 있다”고 말했다.



송진호 기자 jino@donga.com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