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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 외면당한 위안부 할머니, 그 모진 세월…

입력 | 2022-02-10 03:00:00

김순악 할머니 일생 다룬 다큐영화 ‘보드랍게’ 23일 개봉
‘아이 캔 스피크’ ‘귀향’ ‘김복동’ 등 기존 위안부 영화들과 다르게
투쟁활동前까지 질곡의 삶 초점… “내게 보드랍게 얘기한 사람 없어”
기지촌 생활 등 고스란히 담아… 할머니 증언영상-애니 등 배치해



영화 ‘보드랍게’의 주인공인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가 생전 원예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해 만든 압화 작품을 들고 있는 모습.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기존 영화들과 달리 광복 이후 할머니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 필앤플랜 제공


“말하자면 아가씨나 머슴애나 어린애나 내 눈에 뵈기 싫어. 그렇게 사람을 안 만나고 싶다카이. … 내 얘기하면 ‘하이고, 참 애먹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

위안부 피해자 고 김순악 할머니(1928∼2010)가 생전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등을 통해 남긴 영상 증언 중 일부다. 위안부 피해를 겪은 데 더해 광복 후 반겨주는 이 한 명도 없는 세상에서 산전수전을 겪어낸 김 할머니는 한때 모두에게 마음을 닫고 위악을 부렸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두고 ‘깡패할매’라고 부르기도 했다. 국회에서 증언을 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등 공개 활동에 나서기 전까지 할머니는 세상으로부터 ‘보드라운’ 대우를 받지 못했다.

2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는 김 할머니의 일생을 다룬다. 경북 경산의 산골마을에 살던 그는 열여섯 살이던 1944년 대구에 있는 실 푸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동네 아저씨를 따라나섰다가 위안소로 끌려간다.

“(동료들끼리 옷 등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공장에) 빨리 팔려간다’ 이러면서 공장인 줄 알고…. (알고 보니) 나중에 멀게 만주로 멀게 어디로 어디로….”

할머니의 증언이다. 순사에게 끌려가느니 공장에 가는 게 낫다며 태어나 처음 기차를 탄 산골소녀의 모습은 흑백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댕기머리 소녀와 아득하게 깔리는 증기기관차 소리는 관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간 국내에선 ‘아이 캔 스피크’ ‘귀향’ ‘허스토리’ ‘눈길’ ‘김복동’ 등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가 여러 편 나왔다. 이들 영화는 주로 피해가 발생한 소녀 시절과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투쟁에 뛰어든 이후의 시기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 ‘귀향’에서 조선인 소녀가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장면. 와우픽쳐스 제공

‘귀향’(2016년)은 14세에 위안소에 끌려간 소녀와 동료들이 겪는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김희애가 주연한 ‘허스토리’(2018년)는 1990년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와 싸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관부재판’ 실화를 다룬 작품. 나문희 주연의 ‘아이 캔 스피크’(2017년)는 민원왕으로 소문난 옥분이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2019년)은 여성운동가로서의 김복동 할머니에게 초점을 맞췄다.

‘보드랍게’는 광복 후부터 노년에 접어들어 피해 사실을 알리고 여성운동가로 활동하기 전까지 김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주목한다. 김 할머니가 동두천 기지촌에 들어가는 등 ‘불편한 진실’까지 그대로 보여준다. 박문칠 감독은 “할머니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상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사실상 없었다. 위안소를 나와서도 2차, 3차 피해를 겪은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할머니가 직접 증언하는 영상과 함께 젊은 여성들이 할머니의 증언록을 읽는 영상도 담았다. 젊은 여성들은 “말하자면” 같은 할머니 특유의 말투까지 살려가며 증언록을 읽는다. 박 감독은 “현재 여성들의 시점으로 할머니의 삶을 되새겨 보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는 2020년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할머니의 증언 영상과 애니메이션, 실제 자료 영상을 다채롭게 배치하고 속도감 있게 편집해 극영화 같은 느낌을 풍긴다. 박 감독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아무도 듣지 않았던 때 그들이 어떻게 버텨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할머니를 깊이 이해하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