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으면 마음속은 버려진 우물이나 다름없지.
붓과 벼루가 도르래라면, 읊조림은 두레박줄.
아침마다 반복해서 길어 올리면, 여전히 맑고 시원한 물 얻을 수 있지.
(一日不作詩, 心源如廢井. 筆硯爲(녹,록)로, 吟詠作미경. 朝來重汲引, 依舊得淸冷. 書贈同懷人, 詞中多苦辛.)
― ‘농담 삼아 친구에게 보내다(희증우인·戱贈友人)’ 가도(賈島·779∼843)
시심(詩心)이 우물물이라면 붓과 벼루는 도르래요, 읊조림은 두레박줄과 같아서 시를 길어 올리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입으로 읊조려가며 바지런히 손을 놀려 ‘맑고 시원한’ 시구를 길어 올리는 게 시인의 책무. 두레박질을 멈추면 시심은 썩거나 말라버린다. 왜 두레박질을 반복하는가. 취향이 유달리 고상하다거나 시재가 특출나서가 아니다. 고심을 거듭하며 시어를 선택하는 고질적 시벽(詩癖) 탓이다. 오죽하면 스스로도 ‘시 두 구절 3년 만에 얻고 나서, 한 번 읊조려 보니 눈물이 주르륵’이라고까지 했을까. ‘글자 속에 고뇌가 가득 넘친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유난 떤다는 소릴 들을까 계면쩍었는지 시제에 ‘농담 삼아’라 토를 달았다. 쉼 없이 두레박질하는 시인의 고달픈 운명을 친구도 공감했을 것이다.
고통을 감수하며 시구를 찾고 다듬기를 반복하는 시인들을 ‘고음시파(苦吟詩派)’라 부른다. 그런 태도가 현실적 울분에 기인한 것인지 예술적 결벽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술 한 말에 시 1백 수’를 지었다는 이백의 천연덕스러운 호기와는 대조적인 또 하나의 개성이다. ‘제 상처를 핥으며 핥으며/살아가는 사람/한 번이 아니라/연거푸 여러 번/연거푸 여러 번이 아니라/생애를 두고/제 상처를 아끼며 아끼며/죽어가는 사람, 시인.’(나태주 ‘시인’) 예나 지금이나 빼닮은 운명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