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식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시민들은 평정을 유지하면서 차분히 전쟁에 대비하고 있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표면적으로는 차분하지만 키예프 시민들의 일상은 차츰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유치원에선 폭격에 대비해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가리도록 교육하고 시민들은 총을 사고 무기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응급처치법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다.
우크라이나 국영방송이 전쟁시 방송을 지속하기 위한 이전계획을 수립하고 민간 기업들은 직원들을 언제 대피시켜야 할 지를 평가중이다. 시청에선 폭격 대피소 지도를 배포했다. 주차장은 물론 성인 스트립 클럽까지 포함돼 있다.
아들이 유치원에서 안전수칙을 배운다는 영화제작자 안드리 모로조프(36)은 “불확실성이 가장 싫다. 이제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너무 늦지 않게 준비하려 한다”고 말했다.
모로조프의 부인 테티아나 크리바는 유사시 챙겨야 하는 서류와 비상 식량, 휴대폰이 두절될 때를 대비한 무전기 등이 담긴 가방을 싸 두었다. 아들을 우크라이나 서부의 친척 집에 맡겨두고 교대로 전쟁터를 오가며 필요한 물품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아들이 고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래도 시민들의 일상은 전반적으로 평소와 다르지 않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준 부모들은 커피를 마시고 100년 넘도록 저지대와 성 미카엘 성당 사이를 오가는 케이블카도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이 맘 때쯤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눈덩이와 고드름이다.
드니프로 강 양안에 펼쳐진 이 오래된 도시는 잔인한 침략에 여러번 시달렸다. 몽골, 나치는 주민들의 일상을 파괴하고 제국에 복속시켰다.
집을 떠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연초부터 센터-A 사격장에 8명씩 구성된 10개반이 새로 편성됐다. 소총 등 무기들을 다루는 법과 전투기술을 가르친다. 총기회사는 키예프에서 총기 판매가 급증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국토방위군의 훈련에 참가하거나 전시 약탈과 폭력에 대비하려 한다. 2014년 러시아가 동부지역 반군을 지원해 내전을 일으켰을 때 약탈과 폭력이 난무했었다. 센터-A 사격장 운영자 로만 젬비츠스키는 “사람들이 가족을 지키려 한다”고 말했다.
복싱선수 시절 쇠망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전 복싱 챔피언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는 키예프 중앙 국토방위군에 지원했다. “자식들이 동네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과 기업들이 소개 계획을 마련중이다. 일부 기술기업들은 직원들을 서부 최대 도시 르비브로 옮길 계획이다. 그러나 인사관리 담당자인 크리바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회사들은 많지 않다며 “모든 회사가 르비르로 가려 한다. 도시가 만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평정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주문이다. 키예프 유치원장 알라 진케비치는 학부모 게시판에 “공포감을 자극하고 싶지 않지만 전기와 인터넷이 끊어지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겁낼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원하는 만큼 있을 수 있다. 따듯하고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있다”고 덧붙였다.
학부모들도 대비에 나섰다. 응급물품을 준비하는 것에 더해 자식과 부모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학교에서 진행되는 모의 전쟁 대비 훈련은 “우리”와 “독일인”간 싸움이 아닌 “우리”와 “러시아인”과의 싸움이 됐다. 훈련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러시아가 침공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훈련은 아이들이 재빨리 신발과 겉옷을 입고 대피하는 게임이다. 아이들은 폭격에 대비해 바닥에 엎드리고 방패막이를 세우며 깔깔거린다. 진케비치 선생님(43)은 “전쟁 걱정은 교실 밖에 버렸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최근 몇 년새 정부가 우물쭈물 할 때마다 재빨리 뭉쳐서 행동에 나서곤 했다. 2013년말 시위대들이 부패한 대통령에 맞서 시민군을 조직하고 텐트를 설치했다. 대통령은 해외로 도피해야 했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에 전쟁을 일으키자 자원병들이 나서 러시아 군 및 반군들과 싸웠다. 우크라이나군과 민병대는 주말마다 자기 차로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자원자들에 의지해 보급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모로조프는 부부가 서류를 싸는 것을 아들이 보고 울었다고 했다. 러시아가 침공하면 포크와 나이프로 맞서 아들의 장난감과 집을 지키겠다고 달랬다고 했다. 집에 소총이 있지만 “강도를 막는데나 쓸모가 있지 러시아군 앞에선 쓸모가 없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혼란도 우려된다. 마시 나옘 변호사는 고객들에게 침공에 대비해 집문서를 복사해두는 등 재산을 지키기 위한 법적 조치를 해두도록 돕고 있다고 했다. 긴장 상황을 악용하려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이미 있다면서 고객 3명의 동업자가 사업을 독차지하려는 걸 막아주고 있다고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무법천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전쟁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려 하는 당국도 국토방위군을 훈련하고 방공호를 준비하는 등 대비하고 있다. 키예프시는 방공호 지도를 온라인으로 게시하고 표시판도 달았다. 일부 방공호는 소련 연방 시절 핵전쟁에 대비해 만든 것이다. 클리츠코의 큰 형인 키예프 시장 비탈리는 땅속 깊은 지하철을 주 방공호로 지정했다.
모든 시민들이 방공호로 빠르게 대피할 순 없는 상황이다. 주차장 방공호는 열쇠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올림픽 경기장 인근 펜트하우스 스트립 클럽은 쇼가 진행되는 시간에 돈을 낸 사람만 입장할 수 있다. 현재는 공연이 진행중이다.
공습에 관한 우스갯 소리도 들린다. 한 고급 호텔 식당에서 어느날 저녁 비상벨이 울리고 방화문이 닫혔다. 지배인에게 러시아 침공 때문이냐고 묻자 “오늘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비살벨은 부엌의 프라이팬이 과열돼 나온 연기 때문에 울린 것이라고 했다. 오늘 저녁 피해는 볶음 요리가 메뉴에서 빠졌다는 것 뿐이라면서.
[서울=뉴시스]